미국 지성사학자 크레인 브린턴은 현대인들은 눈 하나 깜짝 하지 않고 원자폭탄을 투하하면서 고대인들을 야만인으로 간주한다고 지적했다. 이 말을 할 때는 냉전기였고, 현대인들도 핵폭탄 사용은 반대한다고 반박한다면 2차 대전, 베트남전 때 시행된 그리고 지금도 우크라이나에서 자행되고 있는 무차별 포격을 예로 들 수 있다.
브린턴의 지적이 현대인의 착각에 대한 일침이었다면 고대인에 대한 편견에도 일침을 놓아야 한다. 원시 부족들의 삶은 순박하고 평화로웠다는 착각은 누구에 의해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 모르겠다. 대항해시대 이후로 유럽 국가들은 세계의 낙후 지역에 사는 사람들에게 문명의 혜택을 선사하고, 야만 상태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 문명국가들의 책임이라고 말했다. 그것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과거에 이런 문명국의 책임론이 제국주의 지배의 도구로 악용되기도 했다. 우리 역사에서도 그런 불쾌한 기억들이 있다. 이런 악용 사례, 또 영화 ‘미션’에도 등장했던 저들에게 영혼이 있느냐는 식의 인종학적 편견에 대한 반발로서 “문명의 때와 자본주의에 절지 않은 원시세계의 순박함”이 등장한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러나 자본의 만행을 비판했던 카를 마르크스도 원시문명 예찬은 반대했다. 원시사회는 순수하고 낭만적인 사회가 아니라 힘과 폭력이 지배하는 야만사회였을 뿐이라고 말이다.
정복자의 군대가 평화롭게 살아가던 세계를 파괴하는 장면도 문명인들의 상상이다. 문명의 무기로 무장한 정복자들이 들이닥치기 전에 원시의 땅에서도 그들 간에 잔혹한 폭력과 파괴가 자행되고 있었다. 단지 폭력의 기록이 남아 있지 않을 뿐이다.
누가 더 야만적일까? 그런 질문 자체가 불필요한 것 아닐까? 인간은 언제나 두 얼굴의 존재이다. 자신의 이해관계가 무관할 때는 상식적인 천사가 되고 이해관계가 걸리면 무슨 명분이든 끌어다 쓴다. 문명은 기아와 질병의 땅에 식량과 의약품을 보낼 수 있는 능력과 무자비한 드론과 미사일을 퍼부을 수 있는 능력을 똑같이 선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