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국으로 돌아가려던 아버지의 열망을 알기에 행복합니다.”
이역만리에서 힙겹게 살면서도 한 푼 두 푼 모은 돈으로 독립운동 자금을 보탰던 재불 독립운동가 홍재하 지사(1892∼1960)의 유해가 다음 달 봉환을 앞두고 있는 가운데 차남 장자크 홍 푸안 씨(80)가 14일(현지 시간) 프랑스 파리의 한 식당에서 간담회를 가졌다. 그는 “아버지가 고국에 대한 염려와 고향의 가족을 못 보는 스트레스로 항상 괴로워하셨다”며 유해 봉환을 반긴다는 뜻을 밝혔다.
주프랑스 한국대사관과 프랑스한인회는 국가보훈처의 국외 거주 독립유공자 본국 봉환 사업을 통해 홍 지사의 유해를 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하기로 했다. 홍 지사의 유족들은 한국 정부가 2019년 홍 지사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할 때 국가보훈처에 유해 봉환의 뜻을 전했다. 당초 2020년 봉환이 이뤄질 예정이었지만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미뤄지다 다음 달 현충원 안장이 확정됐다.
장자크 씨는 “아버지는 항상 고국으로 돌아간다고 확신했기에 임시직으로만 일했다. 늘 경제적으로 어려웠다”고 했다. 귀국만 기다리던 홍 지사는 호텔, 공장, 농장 등을 전전하며 힘겹게 가족을 부양했다. 그 와중에도 3프랑 정도의 월급을 받으면 1.5프랑 정도만 주거비 등으로 쓰고 남은 돈을 모아 독립운동 자금으로 보탰다는 것이다. 당시 홍 지사를 포함해 35명이 함께 모은 6000프랑을 임시정부 파리위원부에 전달한 적도 있다. 그는 “어려운 환경에서 한인들을 돕는 게 힘들었고 아버지의 동양적 사고방식에 저항하고 싶기도 했지만 아버지의 사랑이 큰 걸 알기에 따랐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홍 지사의 집은 유럽을 찾은 한국 인사가 방문하는 장소로도 유명했다. 그는 1948년 장면, 장택상, 조병옥, 정일형, 모윤숙, 김활란 등 당시 유엔총회 대표단도 왔었다며 “집이 마치 대사관 별관 같았다”고 했다. 한국어를 못 하는 장자크 씨는 “아버지는 고국으로 돌아가리란 확신이 커서 우리에게 굳이 한국어를 가르치지 않았다”고 아쉬워했다. 한국에 가면 자연스레 자녀들이 한국어를 배울 것으로 확신했다는 것이다.
1892년 서울에서 태어난 홍 지사는 한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일제의 구금을 피해 러시아로 도피했다. 연해주를 거쳐 무르만스크에 머무를 때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당시 이곳을 점령한 영국이 일본에 한국인 이주자의 이송을 타진하자 당시 임시정부 파리위원부 서기장 황기환 지사가 홍 지사를 비롯한 35명을 프랑스에 입국시켰다. 1960년 이곳에서 암으로 타계했다.
조은아 achi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