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경기침체 등을 우려한 투자자들의 ‘역대급 투매’로 한국과 일본, 대만 증시가 모두 사상 최대 폭으로 하락하는 등 아시아 증시가 일제히 초토화됐다. 기업들의 연쇄 부도나 감염병 확산 같은 대형 악재 없이 막연한 공포심리로 인해 증시가 이 정도로 대폭락하는 것은 전례가 드문 일이다. 그만큼 한국 금융시장이 대외 환경 변화에 매우 취약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으로도 분석되고 있다.
5일 국내 증시에서 코스피는 전 거래일보다 234.64포인트(8.77%) 하락한 2,441.55에 거래를 마쳤다. 하락 폭 기준으로 역대 최대다. 코스닥도 88.05포인트(11.3%) 하락한 691.28에 마감했다. 이날 코스피와 코스닥은 하락 폭이 커지면서 오후에 거래가 20분간 일시 중단되는 ‘서킷브레이커’가 발동됐다. 국내 증시에서 코스피·코스닥 시장에 동시에 서킷브레이커가 발동된 것은 2020년 3월 19일 이후 4년 4개월여 만이다. 코스피는 거래 재개 이후에 지수가 더 떨어지면서 한때 282.23포인트(10.81%) 내린 2,386.96까지 하락하기도 했다.
일본 증시는 더 크게 내렸다. 이날 닛케이 평균 주가는 4,451.28엔(12.4%) 내린 31,458.42로 마감했다. 이날 낙폭은 3,836엔이 떨어졌던 1987년 10월 20일 ‘블랙 먼데이’보다 많아 역대 가장 컸다. 대만 증시 역시 1807.21포인트(8.35%) 빠진 19,830.88로 거래를 마쳤다. 1967년 지수 산출 이후 최악의 폭락장이다.
이날 증시 폭락의 직접적인 이유는 미국의 경기침체 우려다. 미국은 지난 주말 제조업 지표가 악화되고 실업률이 3년 만에 최대치로 올라서는 등 경제 감속에 대한 불안감이 커진 상황이다. 여기에 인공지능(AI) 거품론이 불거지는 등 그동안 증시를 이끌었던 빅테크 기업 실적에 대한 의문이 확산된 것도 증시 하락의 계기가 됐다. 일본의 경우는 기준금리 인상으로 엔화 가치가 다시 급등하면서 수출 기업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그동안 엔화를 저금리에 차입해 세계 각지에 투자(엔 캐리 트레이드)했던 자금이 썰물처럼 빠져나갈 것이라는 전망이 나와 시장 불안을 가중시켰다.
그러나 증시 전문가들은 이런 요인들이 이날 대폭락장을 설명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고 입을 모은다. 글로벌 금융위기나 9·11테러, 코로나19 팬데믹처럼 뚜렷한 이유가 없이 시장이 급전직하하는 것은 막연한 공포심리가 투자자들 사이에 빠르게 전염되면서 비이성적인 투매가 반복된 결과라는 것이다. 김학균 신영증권 리서치센터장은 “주가 급락을 설명할 단서가 뚜렷하지 않다”며 “미국은 지금까지 증시가 과하게 오른 데 따른 반작용일 수 있지만, 한국은 별로 오른 것도 없는 증시가 더 떨어지니 허무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유재동 jarret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