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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 위안부 역에 조선인 여공까지… “이젠 말괄량이-로맨스 해봐야죠”

日 위안부 역에 조선인 여공까지… “이젠 말괄량이-로맨스 해봐야죠”

Posted August. 14, 2024 07:53,   

Updated August. 14, 2024 0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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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일 서울 종로구 동아미디어센터에서 만난 배우 강하나(24)는 꽤 내향적인 사람이었다. “사람들 앞에서 말을 잘 못 한다”고 털어놨다. 성격유형지표(MBTI)는 내향형(I). 자신에게 찾아온 팬에게 사인하고, 함께 사진 찍는 것도 쑥스럽단다.

하지만 카메라 앞에 서자 달라졌다. 조선인 여공들이 일본인에게 항거할 때 썼던 빨간 댕기를 머리카락 끝에 묶고 난 표정엔 결연함이 가득 찼다. 100여 년 전 방직공장에서 일하며 핍박을 버텨온 여공들의 고단함이 어린 모습이었다. 7일 개봉한 영화 ‘조선인 여공의 노래’에 등장했던 조선인 여공 그 자체였다.

강 씨는 2000년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난 재일한국인 4세다. 증조할아버지가 일제강점기에 먹고살기 위해 제주도에서 일본으로 건너와 오사카에 자리를 잡았다. 공장 노동자 등 생계를 위해 닥치는 대로 일하셨단다. 그는 “일본에서 쭉 조선학교를 다닌 뒤 한국에서 대학을 다니고 싶어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기과에 진학했다”고 말했다.

연기를 시작한 건 5세 때부터다. 어머니가 2005년 일본에서 창단한 극단 ‘달오름’에서 아역을 맡았다. 조선인 학교 폐쇄 명령을 내린 일본 정부에 맞서 싸웠던 사건을 다룬 ‘4·24의 바람’(2007년)을 시작으로 매년 1편 이상을 극단 달오름에서 연기했다. 그는 “사실 어릴 적엔 엄마가 하라니까 아무것도 모르고 연기했다”고 수줍게 웃었다.

대중에게 이름을 알린 작품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 ‘귀향’(2016년)이었다.영문도 모른 채 일본군에 끌려간 열네 살 소녀 ‘정민’ 역을 맡아 열연했다. 청룡영화상, 대종상 신인여우상 후보에 올랐다. 그는 “‘귀향’은 배우의 길을 계속 가야 하나 고민하던 나를 연기로 이끈 작품”이라며 “연기를 왜 해야 하는지, 연기가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를 깨닫게 해줬다”고 했다.

2022년 이원식 감독이 일제강점기 조선인 여공들의 이야기를 영화로 찍자고 제안한 것은 “의미 있는 이야기를 전달하는 것이 배우로서 가장 만족스럽다”는 그에게 또 다른 기회가 됐다. 먹을 것이 없어 돼지 내장을 구워 먹고, 직접 야학을 열어 한글을 익혔던 여성들의 삶에 이끌렸다. 그는 “태생을 벗어날 순 없다는 생각을 했다. 내 정체성을 살리는 연기를 하자고 마음먹었다”고 했다.

영화에서 강하나는 1인 2역을 맡았다. 할머니가 된 여공들의 증언을 듣고 방적 공장 터를 돌아다니면서 과거로의 여행을 이끄는 내레이터이자 쉬지 않고 돌아가는 공장에서 일하던 어린 여공 역을 함께 연기했다. 영화에서 내레이터 강하나가 여공 강하나를 마주하는 장면은 현재 세대가 과거를 이해해 가는 과정처럼 느껴진다. 여공으로 분장한 그가 감정을 절제한 차분한 목소리로 증언록을 낭독하는 장면도 인상적이다. 그는 “영화가 슬프기만 한 건 아니다”며 “조선인 여공들이 힘든 상황을 당당하고 강인하게 이겨내는 과정을 보며 위로를 얻을 수 있다”고 했다.

대학 졸업 과제나 미래에 대한 고민…. 2시간 가까운 인터뷰가 끝나갈 무렵 그는 다시 평범한 대학 4년생으로 되돌아와 있었다. 정체성을 살리는 작품도 좋지만, 특정 틀에 갇힐까 하는 고민은 없을까. 강 씨는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말괄량이 길들이기’ 같은 코미디도 좋고 로맨스도 환영한다”며 “다양한 작품을 해보고 싶다”고 웃었다.


이호재 기자 hoh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