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강동구 천호동에 빌라 한 채를 세놓은 집주인 정모 씨는 최근 세입자에게 갑자기 내용증명을 받았다. 올해 10월인 전세계약 만기가 아직 3달 가량 남았는데 세입자가 별다른 연락도 없이 내용증명부터 턱하니 보낸 것. 정 씨는 “세입자를 못 구해도 전세금을 내줄 현금 여력이 있는데 세입자가 아무 말도 없이 내용증명을 보내 불쾌했다”며 “나 역시 계약 종료일 오후 11시 59분에 전세금을 돌려줄 생각”이라고 말했다.
깡통전세와 역전세난이 이어지면서 전세시장에서 집주인과 세입자 간 불신과 갈등이 커지며 분쟁이 확산되고 있다. 세입자가 집주인에게 계약 종료 의사를 내용증명으로 통보하는 게 관례가 되고 집주인은 세입자에게 전셋값 하락분만큼의 보증금 일부를 나중에 주겠다고 버티는 일도 잇따르고 있다.
26일 대법원 등기정보광장에 따르면 올해 1월부터 5월까지 아파트와 빌라 등 집합건물에 대한 임차권 등기명령은 1만5009건으로 이미 지난 한 해(1만2038건) 수준을 넘어섰다. 임차권 등기는 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한 세입자가 이사간 뒤에도 보증금을 우선 변제받을 권리를 유지하기 위해 신청한다. 과거에는 임차권 등기를 하면 분쟁 사실이 등기부등본에 남아 이를 꺼리는 경우가 많았지만 최근에는 법적 조치를 취하는 세입자가 급증한 것이다.
전문가들은 집주인과 세입자 간 갈등이 더 늘 것으로 보고 있다. 권대중 명지대 부동산학과 교수는 “최근 매매량을 보면 시장이 활성화됐다고 보기 어렵다”며 “집주인이 집을 팔아 전세금을 변제하기 쉽지 않은 만큼 불필요한 갈등을 줄이기 위한 조치가 필요하다”고 했다.
정부가 올 하반기(7∼12월) 본격화될 것으로 우려되는 역전세에 대비한 집주인에 대한 전세금 반환 목적 대출 규제 완화를 특정 기간에만 적용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26일 관계 부처에 따르면 기획재정부는 다음 주에 발표할 ‘하반기 경제정책방향’에 이 같은 내용의 전세 반환 대출 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DSR) 완화 방안을 담을 것으로 알려졌다. 기재부가 정책 윤곽을 제시하면 금융위원회 등이 세부 대책을 내놓을 것으로 보인다.
앞서 추경호 부총리 겸 기재부 장관은 8일 관훈클럽 토론회에서 전세금 반환 목적에 한해 DSR 완화 방침을 밝히면서 “일정 기간 전세금 반환 목적의 대출에만 한정할 것”이라고 밝혔다. 원희룡 국토교통부 장관은 19일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보증금 차액에 대해 다음 계약 기간 때까지만 DSR 규제를 완화하는 방안에 대해 검토하고 있다”며 “이런 완화는 길어야 1년 정도 운용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따라 정부 내에서는 전세보증금 차액에 대해서만 DSR 규제를 완화하고, 특정 기간 계약된 임대차에만 적용하는 방안이 논의되고 있다. 갭투자에 나선 집주인이나 대폭 올려받은 보증금을 다른 투기 등에 활용한 집주인도 구제받을 수 있다는 우려에서다. 특히 전셋값이 고점을 찍은 2021년 말∼2022년 초 체결된 임대차 계약을 중심으로 규제를 풀어주는 방안이 거론된다.
정부는 다음 세입자를 보호하는 장치도 함께 검토 중이다. 추 부총리는 18일 방송에 출연해 “다음 세입자가 선순위 대출에 걸리지 않도록 집주인이 전세 반환 보증을 받도록 하는 방안도 고려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축복 bless@donga.com · 최혜령 herstor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