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반도체 공급망 재편 속도가 빨라지는 가운데 일본이 강력한 복병으로 떠오르고 있다. 반도체 공장 투자비용의 ‘최대 50%’라는 막대한 보조금을 지급하면서 로컬 기업은 물론이고 해외 업체 투자를 잇달아 유치하고 있는 것이다. ‘반도체 부활’을 선언한 일본이 공격적인 행보를 이어갈 경우 “향후 10년 내 한국의 반도체 공장 생산성이 일본에 역전당할 수도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25일 국내 주요 반도체 기업과 전문가들의 분석을 종합한 결과에 따르면 미국 마이크론의 일본 히로시마 D램 공장은 투자금의 39%를 일본 정부로부터 지원받음으로써 5∼7%의 원가경쟁력을 추가 확보한 것으로 나타났다. 100원짜리 물건을 팔았을 때 5∼7원을 더 남긴다는 뜻이다. 라인당 수조 원에서 많게는 수십조 원이 투입되는 ‘쩐의 전쟁’인 반도체 설비 경쟁에서 기술력, 양산 노하우 외에 새로운 무기를 추가로 확보하게 된다. D램 시장 세계 3위인 마이크론이 일본 생산기지를 활용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를 위협할 수도 있다.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세계 1위 기업인 대만 TSMC는 구마모토 1공장 설비 투자액의 41%를 일본의 보조금으로 조달했다. 덕분에 추가 확보한 원가경쟁력은 10%로 분석됐다. 일본은 TSMC가 추진 중인 파운드리 2·3공장 계획에 쐐기를 박기 위해 보조금 비율을 50%까지 올린다는 방침이다. 김정호 KAIST 전기전자공학부 교수는 “권투에서 잽만 반복적으로 맞아도 쓰러질 수 있는 것처럼 원가경쟁력 차이도 누적될 경우 판세를 뒤집을 수 있다”고 말했다.
일본 정부는 반도체를 ‘특정 중요 물자’로 지정해 건당 수조 원 규모의 현금 지급이 가능하도록 길을 열어뒀다. 이에 라피더스와 키옥시아 등 자국 기업에도 현금 외 다양한 형태의 측면 지원을 쏟아붓고 있다. 해외 기업 유치와 자국 기업 육성을 동시에 추진하는 ‘투 트랙 전략’이다.
반면 한국은 반도체 시설투자에 대한 현금 지원 정책이 아예 없다. 3월 조세특례제한법 개정안(K칩스법)이 국회를 통과하면서 대기업의 경우 시설 투자액 세액공제 비율이 8%에서 15%로 높아졌지만 일몰법이라 내년 12월이면 제자리로 돌아간다. 일본의 보조금과 한국의 세액공제만 놓고 보면 마이크론이나 TSMC가 한국에 투자할 이유가 없다. 한국은 특히 법인세율, 최저한세 등 세금 자체도 높아 경쟁국 대비 투자 매력도가 떨어져 있다.
반도체 업계 고위 관계자는 “인력, 인프라, 국민 정서 등을 모두 제쳐두고 단순히 숫자만 놓고 따진다면 한국 기업들조차도 일본에 공장을 짓는 게 더 유리할 수 있다”며 “한국 정부나 정치권도 반도체 산업은 경제안보 측면에서 지원을 확대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홍석호 기자 will@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