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전에 참전했다 1973년 제대한 고 씨는 1975년 고향으로 돌아와 두 번째 오징어잡이에 나섰다 납북됐다. 고 씨는 이후 북한에서 결혼해 평북 성천에서 양계장 노동자로 일했다. 고 씨의 남쪽 가족들은 납북에 대한 심증은 갖고 있었지만 법적으로는 실종자로 처리했다.
하지만 1997년 인천에서 여관을 운영한다는 한 여인에게서 중국과 북한을 오가며 장사를 하는 동생이 편지를 전달받았다며 고 씨 가족에게 연락했다. 경기 부천시에 살던 고 씨의 여동생은 한걸음에 인천으로 달려가 오빠의 편지를 확인했다. 남동생 만용(44) 씨는 편지에 누나와 내가 어렸을 적 고향집에서 뛰어놀던 이야기를 상세히 써놓아 금방 형님이 쓴 것이란 걸 알아볼 수 있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고 씨 가족들은 2001년과 2003년 어머니 이름으로 이산가족 상봉을 신청했지만 확인 불가라는 어이없는 통보를 받기도 했다.
가족들은 무작정 정부에만 기댈 수 없다는 생각에 고 씨를 남한으로 데려오는 계획을 세우고 납북자가족모임 최성용() 회장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2002년 6월 마침내 고 씨를 중국 국경지대까지 데려오는 데 성공했다. 가족들은 고 씨를 만나기 위해 어머니를 모시고 서울로 가서 기다렸으나 고 씨의 탈북은 성공하지 못했다. 이후 고 씨의 소식이 한동안 끊겨 가족들은 애를 태웠다.
고 씨는 두 번째 탈북을 시도해 3월 24일 성천을 떠나 같은 달 26일 신의주에 도착했으며 28일 국경을 넘어 중국 단둥()에 도착했다. 그는 탈북 후 한동안 북쪽에 남겨둔 부인과 자녀(남매)들을 이야기하며 북한으로 되돌아가겠다고 고집을 부리기도 했다.
하지만 너를 보지 못하면 눈을 감을 수 없다는 어머니의 말을 휴대전화로 들은 고 씨는 같은 달 31일 중국 선양() 한국영사관의 문턱을 넘어 가족을 향한 발걸음을 내디뎠다. 그는 7월 20일 서울에 도착해 관계 기관의 조사를 받았다.
고 씨 가족들은 엄연히 살아있는 것으로 확인됐는데도 정부가 모른 체해 온 처사가 너무한 것만 같다며 그동안 애 끓였던 심정을 토로했다.
어머니 김 씨는 북에 남겨둔 자식 걱정을 할 아들을 생각하면 또다시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다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한편 이날 고 씨의 고향집에는 형제 친척과 주민, 2000년 귀환한 납북어부 이재근 씨, 천왕호 납북선원 가족, 납북자가족모임 회원 등 50여 명이 찾아와 고 씨의 귀환을 축하했다.
천왕호 납북선원 가운데 막내인 이해운(당시 20세) 씨의 어머니 손봉녀(79) 씨는 왜 우리 아들도 데려오지 않았느냐며 통곡해 주위를 숙연케 하기도 했다. 이 씨는 1년만 배를 타고 돈을 벌어 고등학교에 가겠다며 고기잡이에 나섰다.
또 다른 납북선원 최욱일(66) 씨의 부인 양정자(65경기 안산시) 씨는 남북 관계가 좋아지고 있는 만큼 하루빨리 납북선원들의 상봉을 주선하라고 정부에 호소했다.
최창순 cscho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