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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에서] 세대의 변화와 보혁갈등

Posted March. 05, 2001 1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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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대 대학을 다녔던 사람들은 이념논쟁에 익숙하다. 대학가의 민주화운동이 반미() 자주화운동으로 그 성격이 바뀔 때였기 때문에 그들은 선배들보다 더 넓은 이념적 스펙트럼을 경험할 수 있었다.

운동의 지향점, 투쟁방법 등을 놓고 강온, 여러 그룹이 있긴 했지만 이들이 공통적으로 믿었던 논리적 전제는 분단구조가 완화(해체)되지 않는 한 정치적 민주화는 물론 분배의 정의 실현도 요원하다는 것이었다.

그들에게 분단은 한국사회의 모순의 시작이자 끝이었다. 군사적 권위주의체제가 존속하는 것도, 경제적 불평등이 심화되는 것도 분단 때문이었다. 분단은 억압과 폭력에 기초한 불합리한 지배구조를 영속케 하는 구실이자 명분이었다. 적어도 그들은 그렇게 믿었다.

그런 그들이 어느 사이에 우리 사회의 허리층으로 성장했다. 나이로 치면 30대 중반에서 40대 초중반이고, 직장으로 따지면 대리 과장 차장 부장급이다.

이들의 힘은 전 세대의 같은 연령층이 누렸던 것보다 더 크다. 산업사회가 지식 정보사회로 바뀌면서 한 개인의 영향력의 크기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커졌기 때문이다.

80년대 민주화운동에 대해선 다양한 평가가 있겠지만 이들의 투쟁과 성장이 우리 사회를 이념적으로 더 탄력성있게 만들었다는 데 대해선 이론이 없다. 근현대사에 대한 해석에서부터 사회변혁논쟁에 이르기까지 80년대가 없었더라면 우리의 정신세계는 그만큼 빈한했을 것이다그렇다고 그들의 도식화된 운동논리까지 지지한다는 것은 아니다. 개인적으로 나는 그들의 주장과 신념에는 다분히 허위의식(false consciousness)적인 면이 있었다고 본다.

문제는 이들의 성장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는 여전히 양분된 보혁() 대결 구도 속에 갇혀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는 데 있다. 몸으로 부딪히면서 80년대의 이념적 혼란기를 보낸 세대들이 이 사회의 허리로 성큼 성장했다면 이념논쟁의 외연도 그만큼 넓어졌어야 할 텐데 그렇게 느껴지지가 않는 것이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역시 동족상잔의 625가 남긴 상처가 아직도 크고 깊다는 것이 주된 이유 중의 하나일 것이다. 그 상처 위에서 말 없는 다수는 여전히 보수이거나 보수라고 믿기 때문일 것이다. 남북관계를 동서독과 단순 비교할 수 없게 하는 것도 비극적 전쟁 경험의 유무가 아닌가.

여기에 지역적 정파적 이해관계가 겹쳐진다. 남북문제는 가능한 한 지역정서로부터 자유로운 눈으로 봐야 하는데 그렇게 되고 있는 것 같지가 않다. 지역감정이 보혁 대결의 외피를 쓰고 나타나는 경우도 적지 않다.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서울 답방이 실현되도록 김대중() 대통령과 김종필() 자민련 명예총재가 합의했다고 한다. 숱한 논란에도 불구하고 김 국방위원장의 서울 방문이 분단구조 완화에 도움이 되리라는 전망은 크게 틀리지 않아 보인다.

보혁 어느 쪽이든 부디 이성적으로 사고하고 접근할 때다. 보수층을 공연히 자극하는 발언이나, 막가파식 수구적 태도는 똑같이 곤란하다. 보혁 갈등은 척결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가 커지고 발전하면 자연스럽게 흡수되는 것이다.

80년대 학번들이 50대, 60대가 되고 90년대 세대들이 다시 그 뒤를 이을 때면 상황은 좀더 나아지지 않겠는가.

이재호 leejaeh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