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두라만 와히드 전 인도네시아 대통령(61)의 미국행은 망명인가, 체면 살리기인가.
국민협의회(MPR)의 탄핵으로 대통령직에서 밀려난 뒤에도 대통령궁을 고수하던 와히드 전 대통령이 26일 신병 치료차 미국으로 떠날 것으로 알려지면서 그 배경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와히드 전대통령의 한 측근은 25일 와히드는 여전히 자신이 인도네시아의 수장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며 26일 미국으로 떠나더라도 결코 자발적으로 대통령궁을 나가지는 않겠다고 밝혔다고 말했다.
이는 메가와티 수카르노푸트리 대통령측이 정식으로 대통령궁에서 나가줄 것을 요구할 경우에만 떠날 것이란 얘기다. 스스로 대통령궁을 비워주는 것은 메가와티 대통령의 집권을 정당화해 주는 것이기 때문에 합법적인 절차가 아닌, 쿠데타에 의해 어쩔 수 없이 밀려나는 것이란 인상을 주려는 것으로 풀이된다.
이는 와히드 전대통령이 23일의 탄핵 표결 자체를 위헌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그는 25일 AP통신과의 인터뷰에서 인도네시아는 메가와티 정권하에서 사실상 군부 통치 시절로 돌아갈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와히드 전대통령의 측근은 그가 미국에서 귀국할 때는 자유인권재단을 자카르타에 설립할 준비를 마치고 난 다음일 것이라고 말해 상당기간 미국에 체류할 수도 있음을 시사했다.
그러나 일부 전문가들은 와히드 전대통령이 신병 치료를 핑계로 사실상 미국으로 망명을 떠나는 것으로 풀이하기도 한다.
한편 인도네시아 학생과 일부 시민단체들은 메가와티 정권의 탄생을 환영하면서도 과거 군부 독재를 자행했던 수하르토 세력의 부활을 우려하는 목소리를 내고 있어 앞으로의 추이가 관심을 끌고 있다.
25일 부통령 선거가 치러진 자카르타의 MPR 의사당 주변에는 2000여명의 학생이 몰려들어 부통령 후보로 출마한 악바르 탄중 골카르당 총재와 수하르토 정권 시절 장관을 지냈던 시스워노 유도 후소도를 지목하며 이들이 역사를 거꾸로 돌리려 하고 있다며 시위를 벌였다.
또 시민단체들도 위란토 전 통합군사령관 등 수하르토 정권시절 득세했던 인사들이 다시 메가와티 정권에 참여하려는 조짐을 보이고 있다며 강력히 반발하고 있다.
일부 전문가들은 1980년대 초반부터 집권 골카르당과 유착해온 메가와티 대통령의 남편 타우픽 키마스가 수하르토 일가의 부패 혐의에 대한 수사에 압력을 가하거나 군부 재벌 등과 결탁할 우려가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메가와티 대통령이 수하르토에 의해 축출돼 오랫동안 가택연금 생활을 겪은 아버지 수카르노의 고초를 기억하고 있어 쉽사리 수하르토의 잔존 세력과 손을 잡지는 않을 것이란 게 대다수 전문가들의 관측이다.
권기태 kk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