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추()다. 여름은 아직 달군 화덕처럼 기승을 부리고 있지만 머잖아 그 힘을 다할 것이다. 성()하면 쇠()하는 법이라는 것을 자연의 절기는 이렇듯 소리없이 가르치고 있건만 그것을 모르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인간세상뿐인 듯 싶다.
한광옥() 대통령비서실장이 얼마 전 청와대 직원들의 월례 조회에서 우물 아홉 길을 파도 물이 안 나오면 무슨 소용이냐고 말했다고 한다. 한 길을 더 파서 물이 나오게 해야 하지 않겠느냐. 그러니 좀 더 노력하자는 훈시()이었을진대, 더 파는 한 길이 마무리를 뜻한다면 옳은 말이다.
김대중() 대통령의 올 여름휴가 화두()는 선택과 집중이었다고 한다. 경제 안정과 국가경쟁력 강화, 부패 척결, 교육 개혁과 노사 평화 등 산적한 국정과제 중에서 무엇에 우선 순위를 두고 역량을 집중할 것인지를 숙고한다는 것일진대, 그 또한 마무리라면 옳은 일이다.
하기야 노() 대통령이 고작 사나흘 쉬는 휴가기간마저 선택하고 집중하는 데 머리를 써야 한대서야 딱한 노릇이다. 어차피 이러저러한 국정과제란 줄줄이 엮여 있어 무엇 하나를 따로 떼어놓고 생각하기란 어려울 터이다. 이를테면 부패가 없어져야 국가경쟁력이 높아질 것이고, 노동의 질을 높이려면 교육 개혁이 우선해야 하고, 경제 안정을 위해서는 노사 평화가 따라야 하는 식이다. 다만 이제 이 정부가 다시 무슨 새로운 화두를 던지거나 새로운 선택을 할 때는 지났다는 점에서 벌여놓은 일을 마무리하는 집중은 필요하다.
우물 한 길을 더 파는 것은 말릴 일이 아니다. 선택과 집중도 좋다. 하지만 요즘처럼 나라와 사회가 적대적 이분으로 갈라진 상황에서 우물 한 길을 더 판다고 개혁이 완성될 수 있을지, 선택과 집중을 한다고 그 효과가 극대화될 수 있을지, 아무래도 의문이다. 따라서 무엇보다 시급한 선택은 갈라진 세상을 통합하는 일이다. 단숨에 이뤄내기는 어려울지언정 그것을 화두로 삼고 집중해야 한다.
우선 김 대통령이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를 만나야 한다. 만나는 것이 능사는 아니라지만 여야() 지도자가 척지고 등 돌리고 있어서야 나라가 맞고 있는 파멸적 대립구도가 풀릴 수 없다. 이 총재가 여름휴가 동안 소모적 정쟁()에서 국민통합 쪽으로 생각을 바꿨다고 하니 못 만날 이유가 없다. 한 번 만나서 안 되면 몇 번이라도 만나야 한다. 합의가 안 되면 타협이라도 해야 한다. 그게 정치다. 행여 그 속을 어떻게 믿느냐, 짐짓 여유 부리는 것 아니냐, 우리가 옳으니 이대로 밀고 나가야 한다는 강경론이 계속 먹혀든다면 나라와 국민, 대통령 모두에게 불행한 일이다.
어쩌다가 나라가 이 지경에까지 이르게 됐는지, 따지고 탓하자고 들자면 그동안 정치권의 거친 말싸움과 수많은 논자()들이 제각각 쏟아놓은 말과 글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다만 불을 보듯 뻔한 것은 이대로 가서는 내년 말 여()가 정권재창출을 한들, 야()가 정권탈환을 한들 이 지긋지긋한 적대적 갈등과 대립의 구도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야 다음 대권을 어느 쪽 누가 잡은들 소수 권력 수혜자들 외에 대다수 국민에게 도대체 무엇이 달라질 수 있단 말인가.
총리를 바꾸고 민주당 대표와 청와대 참모진에 새 얼굴을 앉히는 일보다,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연내 서울 답방이 성사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마치 두 동강이라도 난 듯 갈라진 세상을 추스르는 일이다.
불신과 증오를 이해와 상호존중으로 이끌어내지 못하는 한 제 아무리 우물 한 길을 더 판다고 해도 개혁이 그 성과를 얻기는 어려울 것이다. 국정과제의 우선을 정하고 집중한다고 해도 국민 다수의 자발적 동의를 얻지 못한다면 헛수고에 그칠지도 모른다.
이제 김 대통령에게 주어진 피할 수 없는 책무는 민주적 국민통합이다. 그것은 정권재창출보다 훨씬 가치있는 일이며, 정권을 재창출할 수 있는 길도 거기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김 대통령이 남은 임기 동안 통합의 리더십에 집중한다면 무엇에도 견줄 수 없는 선택이 될 것이다. 곧 가을이다.
전진우(논설위원)
全津雨 youngj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