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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제왕적 권력 그리고 부패

Posted December. 29, 2001 1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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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국가 요직을 맡은 인사들이 대통령한테 임명장을 받는 장면을 보면 내 몸이 다 굳어지는 느낌이다. 그 자리에 서 보질 못해 정확히는 알 수 없되 텔레비전 화면상의 사람 크기를 기준으로 목측을 하자면 대통령과 임명장을 받는 사람의 간격은 4m가 족히 되어 보인다. 새 감투의 주인공은 거기서 몇 걸음 나아가 허리를 깊이 숙여 임명장을 받은 후 대통령과 악수를 하는데 여전히 두 사람간의 거리가 만만치 않아 흡사 남북회담장의 테이블 건너로 손잡는 듯한 어색한 모습이 매번 꼭 같이 연출된다.

가문의 영광인데 무릎꿇고 받으면 어떻고, 땅에 머리 조아리고 받으면 무슨 상관이냐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냉정하게 주위를 살펴보면 우리가 무슨 왕조시대에 살고 있는 것도 아닌데 뭐 이런 권위주의적 행태가 다 있나 싶을 만큼 이 시대 제왕적 권력의 흔적은 도처에 널려 있다.

정부 내 대통령 지시사항을 관리하는 자리에서 일했던 이들 가운데 아무 의미 없는 지시를 왕의 교지나 되듯 받들고 이행 여부를 챙겨야 했던 고민을 실토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 역시 제왕적 권력의 산물이 아닐까.

예컨대 역대 대통령의 지시 가운데 빠지지 않고 등장한 것이 서민생활 안정을 위해 반드시 물가를 잡으라는 것과 내년에는 국제적 여건이 좋지 않을 전망이니 수출에 총력을 기울이라는, 말하자면 밥 먹으면 배부르다는 식의 지시였다. 이런 건 해당부처의 일상적인 업무에 해당하는 데도 그걸 대통령이 지시로 내리면 경제부처는 밤을 새워가며 대책을 마련하느라 난리를 치른다. 수해 현장에서 대통령이 조속히 물에 잠긴 논에서 물을 빼고 쓰러진 벼를 바로 일으켜 세우라고 지시하면 갑자기 횃불 든 공무원까지 동원돼 말씀을 실천에 옮기느라 홍수진 논에서는 한바탕 법석이 벌어진다. 대통령 지시가 있기 전까지는 손가락 하나 까딱 않고 있었단 말인가.

수십년 동안 으레 그러려니 비판받지 않고 반복되다 보니까 이제는 대통령의 행동에 대해 주변에서 과장과 거짓을 말해도 세상은 무감각한 표정이다. 대통령이 해외출장에서 돌아올 때 종종 등장하는 이번 세일즈 외교의 경제적 성과가 얼마다하는 발표가 그 중 하나다. 참고로 이달 초 김대중 대통령의 유럽출장에서는 무려 104억달러를 단번에 건졌다. 대통령이 직접 나서기 전까지 도대체 해당부처와 수출기업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모르지만 이 계산법대로라면 내년도 수출목표쯤은 대통령이 매달 한번씩만 해외순방을 하고 나면 가뿐히 달성될 터이다.

제왕적 권위가 존재하면 권력은 극소수 측근인사들에게 집중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권력집중보다 더 큰 문제는 그들에 대한 비판이 금기시된다는 점인데 공자 말씀대로 비판에서 자유로워질 때 소인배들은 부패해질 가능성이 비례해서 높아지게 마련이다. 각종 지저분한 게이트들과 대통령 아들이 거명되는 사건들이 과연 우연일까.

말이 나온 김에 더 하자면 김홍일 의원이 대우에서 거액의 비자금을 받았다는 사실(!)도 그렇다. 이번처럼 정치자금을 준 쪽에서 확실하고 구체적으로, 그리고 자발적으로 사실 확인을 해 준 경우가 거의 없었는데도 이 문제는 슬금슬금 꼬리를 감추고 있다.

그게 대우뿐이었을까. 또 이런 유의 문제가 공소시효가 지났다는 1988년만의 일이었을까. 빙산의 크기가 얼마나 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이 사건은 이러저러한 속사정들로 흐려지고 있다. 물론 지금 덮어진다 해도 이 사건이 지구상에서 영원히 침묵되지 않으리라는 짐작은 쉽게 간다. 임기 1년여를 남기고 있는데도 문제가 불거지기 시작했다면 임기 후 사정이 어떠할지는 불을 보듯 환하지만 아직은 역시 비판이 금기인 것 같다.

대통령 최측근 권력기관이 총출연한 게이트들과 대우 비자금 수수를 둘러싼 입소문, 그리고 이 사건의 한가운데 서 있는 대통령 아들의 초라한 변명 등으로 부패 정국의 연말은 그 어느 해보다 더 심란하고 어수선한 모습이다. 완결되지 않은 게이트들의 속편이 새해 벽두를 장식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송구영신의 희망으로 내년을 시작하기도 힘들게 됐다. 죄도 없는 국민이 한숨 속에 해를 보내야 하는 작금의 사태는 대통령의 제왕적 권위가 지속되는 한 아마도 역사 속에 끝없이 반복될 것이다.

이규민(논설위원)



kyuml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