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현-팬들은 아직도 그 장면을 잊지 못한다.
11월2일 뉴욕 양키스타디움에서 9회말 김병현(22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이 2사후 스콧 브로셔스에게 2점짜리 동점홈런을 맞은 뒤 마운드에 쪼그려 앉았던 모습을. 운명의 장난이라 할 만한 이틀 연속 9회말 2사후 동점홈런 허용. 김병현은 곧 울음이라도 터뜨릴 듯한 표정으로 머리를 두 손으로 감쌌다. 외신들은 그 순간을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남자라고 표현했다.
하지만 하늘은 애리조나에 4승3패의 역전우승을 안겨주며 김병현을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남자로 만들어줬다. 첫 월드시리즈 우승반지를 끼게 된 동양인. 올 한해 김병현 만큼 지옥과 천당을 오가며 극적인 영욕을 함께 맛본 사람이 있을까. 때문에 김병현은 잊지 못할 2001년이 가는 게 아쉽기도 하고 한편으론 후련하기도 하다.
정말 많은 일이 내게 일어났죠. 기쁜 일도 있었고 슬픈 일도 있었습니다. 또 기분 나빴던 일, 즐거웠던 일도 기억이 나네요. 내 야구인생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한해였습니다. 야구는 혼자 하는 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죠. 2001시즌을 마음속에 담아두고 앞으로 더욱 노력해서 팬들의 기대에 보답하고 싶어요.
월드시리즈 기간 중 가장 팬들과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많이 받은 선수가 된 김병현은 이제 내년시즌 투구 하나 하나가 관심의 대상이 될 게 분명하다. 월드시리즈가 끝난 뒤 갑자기 자신에게 쏟아진 관심이 버겁겠지만 그 부담을 훌훌 털어 내는 것도 그의 몫이다. 이제 팬들은 충격적인 홈런을 맞은 뒤 사라져 간 메이저리그의 다른 투수들과 달리 김병현이 보란 듯이 타자들을 멋진 삼진으로 잡아내며 진정한 스타로 발돋움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한다.
김미현- 앙증맞은 김미현(24KTF)은 귀여운 미소로도 큰 인기를 끌었다. 평소 인상 한번 쓰는 일이 없었지만 그때만큼은 흐르는 눈물을 감출 수 없었다. 7월 캐시아일랜드챔피언십에서 플레이오프 끝에 로지 존스(미국)에게 패해 준우승에 머문 뒤 울음을 터뜨린 것. 4월 오피스디포에서 아니카 소렌스탐(스웨덴)에게 연장전에서 무릎을 꿇은 데 이어 또 우승 문턱을 넘지 못하면서 복받치는 슬픔을 누를 수 없었단다.
우승에 대한 부담과 조급증이 생기다보니 고비를 넘기지 못했던 것 같아요.
하지만 김미현의 불운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8월 메이저대회인 브리티시여자오픈에서도 선두를 달리다 막판 박세리에게 역전을 허용해 우승 트로피를 내줬다. 준우승만 3차례한 김미현은 미국 진출 3시즌 만에 처음으로 우승컵을 안아보지 못한 채 시즌을 접어야 했다. 게다가 잠시 짬을 내 출전한 국내대회에서도 우승을 못해 96년 프로데뷔 후 첫 무관의 해를 맛봤다. 혈관이 약한 탓에 자주 터진 코피와 잔병치레까지 그녀의 발목을 잡았다.
스포츠 세계는 늘 1등만이 기억에 남잖아요.
13차례 톱10에 드는 꾸준한 성적으로 상금랭킹 8위에 올랐는데도 정작 우승이 없어 가슴 한 구석이 허전하기만 했다. 지는 해와 함께 아픈 기억까지 묻고 싶다는 김미현은 28일 재도약을 다짐하며 미국으로 떠났다. 내년 시즌은 예년과 달리 2월 말에 시작돼 그 어느 때보다도 충실한 동계훈련을 소화할 수 있다. 쇼트게임과 퍼팅 위주로 샷을 가다듬을 계획이며 어떤 위기에도 흔들리지 않도록 마인드컨트롤도 배울 생각.
아쉬움 속에서도 미국 무대에 거의 적응했다는 자신감을 얻었어요. 미련은 훌훌 털어 버리고 다시 새롭게 시작할래요. 유달리 밝게 들리는 김미현의 목소리에서 쓰라린 상처는 어느새 말끔해진 듯싶었다.
김상수 ssoo@donga.com · 김종석 kjs0123@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