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 문화권에서 쓰이는 인사말 나마스떼는 당신에게 깃들어 있는 신께 문안드립니다라는 뜻이라고 한다. 가만히 음미하다 보면 등짝이 서늘해진다. 인도인들은 아주 오랜 옛날부터 사람 안에 신이 깃들어 있다고 믿었던 것 같다.
고대 힌두교의 한 발전적 계승이라고 할 수 있는 불교 역시 깨달으면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는 믿음을 섬긴다. 인도 출신 명상가 바그완 라즈니쉬의 책 반야심경의 첫 글월은 다음과 같다.
여러분 안에 깃들어 있는 부처께 문안드립니다.
라즈니쉬의 생각에 따르면 우리 안에는 부처가 있다. 우리가 의식하지 못할 뿐, 우리 안에는 부처가 분명히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공부를 지음으로써 깨닫는다는 것은 그 부처의 잠을 깨우는 일이라는 것이다. 우리 토박이 종교 천도교는 사람이 곧 한울()이라는 믿음을 섬긴다. 천도교는, 사람이 한울을 믿어 이 둘이 하나인 경지에 이르는 일을 궁극적인 목표로 삼는다. 사람이 한울과 하나 되는 것은, 사람 안에 한울의 씨앗이 없고는 도무지 가능하지 않은 일일 터이다.
나는 고대 신화에 대해서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다. 나는 우리 안에 고대 신화라는 이름의 강이 흐르고 있다고 믿는다.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고대의 잔재, 카를 융의 보편 무의식, 머치아 엘리아데의 본()은 이 강의 다른 이름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신화를 읽을 때, 처음 접하는데도 불구하고 어디에서 많이 들어본 것 같다는 느낌, 어디에서 읽어본 것 같다는 느낌에 사로잡히는 것도 바로 우리 안에 신화의 씨, 혹은 싹이 깃들어 있기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도 신화 이야기를 할 때는 라즈니쉬를 흉내내어, 여러분 안에 깃들어 있는 신화에 문안드립니다라고 말하고는 한다. 신화 읽기는 우리 안을 흐르던 강 같은 신화를 마중하기 혹은 다시 흐르게 하기라고까지 나는 생각한다.
기원전 4세기에 활약했던 그리스의 조각가 중에 뤼시포스라는 특별한 사람이 있었다. 남아 있는 그의 작품 중 진품은 그리 많지 않다. 하지만 그는 로마 시대에 이르기까지 등신대 대리석상 제작의 전범이 되었던 조각가다. 어떻게 하면 그렇게 아름답게 깎을 수 있느냐는 사람들의 질문을 받고 뤼시포스가 했다는 말 한마디, 자주 내 귓가를 맴돈다.
군더더기를 쪼아 내었을 뿐인 걸요.
대리석 덩어리 안에 대리석상이 들어 있다는 믿음 없이 이런 말을 할 수는 없을 터이다.
아름다운 불상을 보고 어느 기특한 돌쪼시가 돌 속의 부처님을 참 곱게도 모셔내었구나 하고 감탄했던 걸 보면 우리 시인 미당 서정주도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노래 중에는 한두 번 듣고도 따라 부를 수 있는 노래가 있다. 이럴 경우, 나는 그 좋은 노래가 정거장으로 나와 내 안에 깃들어 있던 노래를 마중했다고 여긴다. 모란 동백이라는 노래가 있다. 나는 TV에서 가수 조영남이 부르는 모란 동백을 딱 한번 들었을 뿐인데도 그날 하루종일 그 노래를 흥얼거렸다. 며칠 뒤 조영남을 만난 자리에서 나는 그가 부른다면 나도 따라 부를 수 있노라고 장담했다. 실제로 나는 그 자리에서 절반쯤 성공을 거두었던 것 같다. 조영남은 눈물이 나서 공개석상에서 그 노래 부르기가 망설여진다고 실토했다.
나는 내가 그 노래를 한번 듣고도 흥얼거릴 수 있었던 까닭, 조영남이 눈물이 나서 공개석상에서 부르기 망설여진다고 한 까닭을 짐작한다. 그 노래가 내 속에서 불리던 노래를 마중한 것이 아니라면, 한번 들은 노래를 흥얼거리는 일이 음악가도 아닌 나에게 어떻게 가능하겠는가. 그 노래가 조영남의 삶의 뒤안을 흐르고 있던 정체 모를 슬픔을 마중한 것이 아니라면, 부를 때마다 눈물나게 하는 일이 조영남같이 명랑한 가수에게 어떻게 가능하겠는가. 이제하 시인이 만들었다는 그 노래가 우리 안의 노래, 우리 안의 슬픔을 마중한 것이라고 이제 말해도 좋지 않을지.
문안 인사 여쭙기, 불러내기, 다시 흐르게 하기, 마중하기. 내 나날의 화두는 이렇듯 번잡하다. 글 쓰는 것이 직업인 나는 이 번잡한 화두를 받아쓰기로 요약함으로써 내 기본기를 다지고자 한다. 나는 기본기라고 했다.
이윤기(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