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의 악의 축 발언으로 한반도에 긴장이 고조되고 있는 가운데 한미 정상회담이 한국에서 열렸다. 이번 회담의 성과는 첫째로 한반도에 전쟁은 없다라는 점을 확인하여 한국 국민을 안심시켜 준 것이고, 두 번째는 대량살상무기 문제를 대화로 풀어나가겠다고 합의한 점이다. 부시 행정부가 취임한 이래 삐꺽거려 왔던 한미 관계가 이번 정상회담으로 어느 정도 복원된 것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한반도 평화유지와 북한의 대량살상무기, 그리고 재래식 무기 문제를 풀어 가는 방법론에서는 근본적인 인식의 차이를 보이고 있어 갈 길은 멀기만 하다.
북한을 악의 축 정권으로 치부할 만큼 부시 대통령에게 비친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이미지는 대단히 좋지 않다. 부시 대통령은 정상회담 직후 공동기자회견에서 북한 주민에게 자유를 허용하지 않고 굶기는 김정일 정권을 신뢰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도라산역에서의 역사적인 연설에서도 다소 부드러운 표현을 구사했지만 부시 대통령은 위험한 정권이 위험한 무기를 보유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겠다고 말해 대북 강경정책에 변함이 없음을 상기시켰다.
한국이 햇볕정책을 통해 북한에 대해 보여준 인도적, 경제적 노력만큼 북한도 이산가족 상봉 등 변화된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확고한 의지도 표명했다. 한반도에 평화를 유지해야 한다는 원칙에는 두 정상이 똑같은 입장을 보이고 있으나, 이것을 어떻게 성취해야 할 것인가에는 뚜렷한 의견 차이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떠한 정책으로 미국과의 공조를 이끌어 내며 북한을 개방시켜 한반도 평화를 성취할 수 있을 것인가.
첫째는 북한의 핵과 미사일뿐만 아니라 재래식 무기마저도 미국에 참여의 문을 열어 적절한 역할을 맡도록 해야 한다. 지금까지 핵과 미사일 분야의 협상은 미국이 주도적으로 맡아왔지만 재래식 무기 분야는 한국이 주도적으로 그 역할을 분담한다는 것이었는데, 미국의 테러 대참사로 미국의 테러저지 입장이 확고한 만큼 양국 간 공조의 길을 모색해야 한다. 재래식 무기라 하면 우리는 탱크나 전투기와 같은 통상전력을 연상할지 모르나, 미국의 신경을 건드리는 재래식 무기는 비무장지대로부터 100마일 이내에 배치되어 있는 8000여문의 대포들이다. 북한의 포병화력은 시간당 40만50만발의 포탄을 발사할 수 있는 능력이고, 이는 4000여개가 넘는 지하시설로 방호되어 있어 한국민과 주한 미군이 가장 위협적으로 느끼는 재래식 전력이다. 이 가운데 500여문이나 되는 장거리포는 서울까지 발사할 수 있어 이른바 불바다론이 가능해지는 근거가 되고 있다.
따라서 테러의 악몽을 겪은 미국이 한국민뿐만 아니라 주한 미군의 보호를 위해서도 재래식 무기를 북한 후방으로 물리려는 노력을 이해해 주어야 한다. 햇볕정책을 통해 간신히 남북이 교류하는 토대를 만들었으나, 괄목할 만한 성과가 없다고 비난받는 이유는 한반도 안보상황이 특별히 나아진 것이 없다는 점이다. 테러의 공포를 갖고 있는 미국으로서 해외주둔 미군에의 위협을 근본적으로 제거하자는 의도는 시간을 두고 질질 끌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이다. 우리로서는 쉽게 손대기 어려운 이 문제를 미국에 한 번 맡겨 보는 것도 지혜로운 방책이 될 수 있다. 결코 국가주권의 상실이 아니다.
두 번째는 북한에 대한 경제원조를 대폭적으로 확대할 일이다. 지금까지 햇볕정책에 대한 비난이 주로 퍼주었다라는 점에 집중되어 왔는데 한반도 평화를 유지하고 전쟁방지를 위해 그 정도의 경제지원을 한 것으로 퍼주었다고 볼 수는 없다. 분명한 것은 햇볕정책을 통해 남북이 교류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었다는 점이다. 냉정히 생각해 보자. 전투기 한 기 값이 1300여억원이나 하는 마당에 평화 유지를 위해, 그리고 인도적인 차원에서라도 지금까지의 경제 원조가 과도한 것은 아니다. 비난을 위한 비난은 삼가야 할 일이다.
우리가 햇볕정책을 시행하는 과정에서 통일에 대한 환상을 너무 키운 것이 잘못이라면 잘못이다. 이제는 냉철한 시각으로 대량살상무기를 제거하고 휴전선에 배치된 무기들을 후방으로 후퇴시키면서 전쟁위험이 없는 한반도를 만들고, 동북아 번영의 중심 축으로 한반도를 변모시켜 나갈 때 통일의 꿈도 저절로 성취될 것이다.
김경민(한양대 교수,국제정치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