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1 테러 이후 한 달여 동안 미국에서는 12만여명이 일자리를 잃었다. 항공기 승객이 급격히 줄어드는 바람에 승무원 2만2000명이 일터에서 떨려났다. 보잉사는 민간 여객기 주문이 감소하자 최근 2900명을 해고한데 이어 올해 말까지 3만명을 감원할 계획이다.
미국 기업들은 매출이 줄어들면 종업원부터 먼저 자르고 본다. 미국 가정 4가구당 3가구가 해고를 경험했다는 통계가 있을 정도이다.
경영진의 의지에 따른 해고가 대규모로 진행돼도 노동조합은 속수무책이다. 미국은 노조 조직률이 12%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최하위권을 맴돌아 노동조합이 죽었느냐는 걱정이 나온다. 미국노동총동맹-산업별조합회의(AFL-CIO)는 노조 조직률을 높이기 위해 전체 예산의 30%를 쏟아 부으며 지원을 하는 데도 대규모 사업장의 노조설립 찬반투표에서 번번이 패배했다.
미국에서 노조 운동이 왜 위축되는가? 우선 산업구조가 서비스 산업화하면서 파트타임 임시직 등 고용 형태가 다양화돼 노동자들이 이질적으로 분화됐다. 임금은 능력과 실적에 따라 지급되기 때문에 근로자별 임금격차가 커져 노사 협상을 통해 획일적이고 집단적으로 협상하기가 불편해졌다. 능력급을 받는 신세대 직장인들은 개인주의적 성향이 강해 노동자 전체의 파이를 키우는 투쟁에 별 관심이 없다. 만국의 노동자가 단결하기는 고사하고 한 회사의 노동자도 단결이 안 된다.
한국은 노조 가입률이 12%로 미국과 같지만 노동운동의 양태는 세계에 유례가 없을 정도로 격렬하다. 춘투가 시작되면 주말마다 도심 가두 시위를 벌여 차로를 점거하고 각목 쇠파이프 화염병 돌이 흔히 등장한다. 노사 문제가 발생한 공장만 멈춰서는 것이 아니고 직접 관련이 없는 사업장의 근로자들까지 연대 파업에 참여해 사회 기능을 거의 마비시키는 힘을 발휘한다. 노동운동이 민주화 운동과 연계돼 있던 독재정권 시절의 유산이지만 공권력에 폭력으로 맞서고 법률을 위반하는 것을 당연시하는 의식이 아직도 노동 현장에 남아 있다.
박정희 전두환 전 대통령의 철권통치 시대에는 국가안보 위해행위에 준해 노동운동을 극도로 제약해했다. 노동조합이 결성된 사업장에서도 노사 관계가 평등하지 못했다. 해고된 노동운동가들은 투옥되기 일쑤였고 블랙리스트가 나돌아 다른 기업으로의 취업이 봉쇄됐다. 이렇게 노동운동이 핍박받는 시절이라 현행법을 위반하는 다소 과격한 노동운동이라도 비난하기 어려운 분위기가 있었다.
현 정부 들어서는 노동운동을 벌일 수 있는 합법적 공간이 크게 확장됐다. 민노총 전교조가 합법화됐고 머지않아 공무원 노조도 인정될 예정이다. 노동조합의 힘이 세지면서 12% 조직 노동자들의 근로여건은 현저하게 개선됐다. 노동부에 따르면 파업 중인 발전 노조원들의 평균 임금은 연봉 3000만원을 넘는다. 이에 비해 88% 비조직 노동자들은 조직 노동자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임금을 받으며 훨씬 열악한 근로조건을 감수해야 한다.
기업들이 정규 직원을 일단 채용하게 되면 해고가 어렵기 때문에 신규 채용을 꺼리고 인력이 필요하면 인력회사, 아웃소싱, 계약직, 외국인 근로자 등을 활용한다. 조직 노동자들이 강력한 힘으로 열매를 많이 따낼수록 신규 채용은 줄어들고 비조직 노동자의 비율이 높아지는 모순이 생긴다.
강한 노조가 활동하는 나라에서는 기업들이 신규 투자를 기피해 그만큼 일자리 창출 규모가 축소된다. 노동시장의 유연성이 큰 미국 영국의 경제가 상대적으로 잘 나간다. 해고에 대한 규제가 많은 유럽 국가들은 성장이 느리고 해고 비용이 많이 들어 기업들이 채용을 기피해 실업률이 높다.
최근 파업을 벌인 국가기간산업 노조 쪽에서는 공공성이 강한 공기업을 민영화를 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을 펴고 있지만 공기업의 비효율을 제거해 국민의 세금부담을 줄이기 위해서는 민영화가 가장 확실한 수단이다. 선진국은 물론 구 사회주의 국가 그리고 국내의 실험을 통해서도 이미 결론이 났다.
대표적인 공기업이었던 두산중공업(구 한국중공업)은 민영화 이후 군 장성이나 관료 출신 임원을 솎아내 70명에 달하던 임원이 38명으로 줄었다. 창업이래 한번도 이익을 내지 못한 시멘트공장 건설, 철강교량 제작, 제철설비 부문을 폐쇄했다. 전체 인력의 15%인 1160명을 줄여 적자를 내던 기업이 민영화 1년 만에 250억원가량의 당기 순이익을 올렸다.
한국노총과 민주노총이 노조 확보 경쟁을 벌이는 과정에서 경제논리에 반하는 민영화 저지 투쟁을 과열시키고 있다. 국가기간 산업노조는 지금과 같은 민영화 저지 투쟁이 시대의 흐름과 경제현실에 맞는 운동 방식인지 자기 점검을 해봐야 할 것이다. 세계적으로 밀려오는 노동조합의 위기를 헤쳐나가려면 경제 현실에 대한 이해를 높여야 한다.
황호택(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