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동원() 대통령 특사가 방북한 첫날 북측이 난데없이 주적론() 철회를 요구하면서 회담이 진통을 겪었다고 한다. 조선중앙방송도 때맞춰 남측이 역사적인 평양 상봉 때 주적론이라는 것이 더는 없을 것이라고 하고도 계속 그것을 제창하면서 전쟁소동을 일으키는데 대하여 운운하는 방송을 내보냈다.
북측의 이 같은 행동은 남북대화에 임하는 올바른 자세가 아니다. 북측 입장에서 이번 회담은 2003년(혹은 8월) 위기설이 대두되는 등 북-미관계가 점차 위기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는 시점에 갖게 된 기회다. 북측으로선 당연히 이번 회담을 적극 활용해야 할 처지다. 그런 마당에 북측이 이 같은 태도를 보인 것은 그들이 혹시 이번 회담에 대해 다른 의도를 갖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의구심마저 갖게 한다.
일각에선 북측의 행태를 협상력을 높이기 위한 전술이라고 보고 있지만, 설령 그렇다고 해도 우리가 언제까지 북측의 이런 상투적인 협상 전술을 감내해야 하는지 답답할 뿐이다. 그동안 남북대화에서 정부가 좀 더 단호하고 원칙에 충실한 자세를 고수했다면 북측이 이번처럼 엉뚱한 주장을 내놓을 수 있었을까 싶은 생각도 든다.
북한을 주적으로 규정하는 것은 한반도에 정전체제를 대신해 평화체제가 영구히 정착되기 전까지는 결코 변경될 수 없는 일이다. 더욱이 북측이 최소한의 군사적 신뢰구축 조치를 마련하자는 우리측 요구는 무시하면서 우리가 먼저 주적 개념을 철회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임 특사는 북측의 당치 않은 주장에 단호하게 대처해야 한다. 성과에 급급해 주적론과 같은 기본 원칙을 훼손하는 것은 차라리 회담을 안 하느니만 못한 결과를 불러온다. 그렇지 않아도 국방부가 작년에 돌연 국방백서를 발간하지 않아 정부가 주적론을 포기한 것 아니냐는 의심을 받은 일이 있었다. 이번 일은 정부가 그 같은 의심에서 깨끗이 벗어나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