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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측근정치 오래 못간다

Posted April. 29, 2002 1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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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우리 정치의 큰 폐단의 하나는 가신이니 측근이니 하는 사람들이 나랏일을 마치 제 호주머니 속 호두 만지작거리듯이 하는 비민주적인 정치행태다.

지난 군사독재 시절의 어둡고 긴 터널을 지나 마치 눈부신 태양을 마주치듯 한 신선함으로 출발했던 새 정부가 측근정치에 발목이 잡혀 있다는 사실은 그야말로 역설이며 역사의 아이러니다.

눈길에서는 앞 사람의 자국을 밟아야 위험하지 않다. 역사의 교훈이다. 문제의 가신정치, 측근정치는 이미 우리 역사에서도 오랜 전통을 지니고 있다.

측근정치가 가장 성행했던 때는 고려왕조 때다.

고려를 건국한 태조 왕건은 국왕이라 하더라도 여전히 개성 출신의 한 지방세력에 불과하였다.

많은 지방세력에 포위되다시피 한 그로서는 분열된 민심의 수습과 민족 통합의 대도를 위해 신속한 정책 결정과 집행이 필요했다.

믿을 만한 측근을 중심으로 정치를 꾸려갈 수밖에 없었다. 고려 측근정치의 원형은 이렇게 자리잡기 시작했다.

그러나 점차 국왕보다는 측근과 가신의 의견이 더 기승을 부리는 형국으로 변해갔다. 역사의 필연이다.

정책 결정의 신속성과 정책 집행의 일관성은 측근정치의 장점이지만, 절차의 비민주성과 과실의 독점현상은 측근정치의 독소다. 그러한 독소를 낳게 한 저변에는 온정에 바탕한 가족주의가 도사리고 있다.

고려 측근정치의 가장 전형적인 형태는 최충헌-우-항-의로 이어진 4대 60여년간 2명의 국왕을 내쫓았던 최씨 정권에서 찾을 수 있다. 최충헌의 아들 우는 30년간 집권하면서 최씨 정권의 기반을 다졌다.

그에게 애첩인 기생 서련방에게서 낳은 만종()과 만전()이라는 두 서자가 있었지만, 출생에 흠이 있어 그는 사위 김약선을 후계자로 내정하였다. 후계자에서 배제된 두 아들이 난을 일으킬 것을 염려해서 그들을 승려로 삼아 지금의 진주 단속사와 화순 쌍봉사 주지로 각각 내려보냈다.

최충헌 이후 진주지역의 조세는 최씨 집안에 납부되었을 정도로 진주 일대는 최씨 일가의 경제기반이었다. 지금의 순천 보성 진도 등 전라도 지역에도 최씨 일가의 토지가 많았다.

최우는 결국 두 아들에게 경상도와 전라도에 몰려있는 최씨가의 농장에서 나오는 수입을 관리하는 책임을 맡겼던 것이다.

그러나 두 아들은 단순한 재산의 관리인이 아니라, 고리대를 하거나 최고권력자의 아들을 빙자해 수많은 토지를 빼앗는 등 부정과 비리를 저질렀다.

이로 인해 극도로 흉흉한 민심을 보다 못한 형부상서 김훤과 경상도 순문사 송국섬이 용기를 내어 최우에게 다음과 같이 직언하였다.

지금 몽고와 전쟁중입니다. 두 형제마저 백성들의 재산을 제 멋대로 빼앗고 하여 남쪽지방의 민심은 매우 흉흉합니다. 장차 몽고군이 쳐들어오면 백성들이 반역을 일으켜 몽고군에 투항할까 두렵습니다. 두 아들을 서울로 소환하고 죄질이 나쁜 승려들을 잡아들이면 민심이 가라앉을 것입니다.

최우는 두 사람의 말을 듣고, 이를 실행에 옮겼다. 그러자 두 아들이 서울로 올라와 아버지께 호소하였다.

아버님이 살아 계실 때에도 우리 형제가 이렇게 고통을 받는데, 이러다가 백년 후에는 우리 형제들의 죽은 자리도 찾기 어려울 것입니다.

최우는 아들의 목소리에 마음을 바꾸어 부자를 이간한다고 하여 직언을 한 김훤은 유배를 보내고, 송국섬은 좌천시켜 버렸다.

둘째 아들 만전을 환속시켜 이름을 항으로 고치고, 후계자로 삼았다. 최우가 죽기 2년전의 일이었다. 물론 후계자로 낙점한 사위 김약선은 이미 제거된 뒤였다.

두 형제의 눈물어린 하소연이 30년 권좌의 최고권력자를 부도덕한 아들을 감싸야만 하는 평범한 아버지로 만들었다. 두 형제가 큰 소리쳤듯이 백년은 갈 것이라 믿었던 철옹성 같은 최씨 일가의 권력은 그로부터 채 10년이 되지 않아 쿠데타로 무너졌다.

혈연을 우선시한 온정주의가 최고권력자의 정치적인 판단을 이토록 흐리게 했으며, 가신정치와 측근정치가 예나 지금이나 경제적인 비리와 부패라는 독소를 안고 따라다닌다는 역사의 소리에 우리는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역사의 교훈은 이렇게 엄정하고 무서운 것이다.

받종기(국민대 교수, 한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