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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신분상승이 가져온 비극

Posted May. 04, 2002 0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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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나는 모든 명령을 내릴 수 있는 권한을 갖게 됐다. 지나간 내 인생은 모두 이 순간을 위해 존재한 것이 아닌가 생각됐다. 나는 깊은 안도의 기분으로 잠자리에 들었다. 영국의 윈스턴 처칠이 치열한 정치역정 끝에 예순다섯의 나이로 총리에 오르던 날 밤, 그는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모두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자리, 국민 이외에는 누구로부터도 명령을 받지 않는 자리에 오른다는 것은 정치인들에게 가장 극적이자 최종적인 성취에 해당한다. 인간은 목표의 획득보다 목표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더 큰 보람을 느끼는 존재라고 하지만 국가원수 자리는 신분상승이 주는 엄청난 변화 때문에 목표달성 그 자체가 충분히 매력적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그런 자리에 올랐던 많은 지도자들이 상승한 신분을 감당하지 못한 나머지 대통령직을 영광으로 시작해 오욕으로 마감하고 있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정치적 패권을 차지한 후 주변인물들이 덩달아 급속한 신분상승을 추구할 때 그걸 방관한 대통령은 예외 없이 임기중에 영()과 욕()을 순서대로 맞았는데 김대중 대통령은 지금 후자를 겪고 있다.

아들 셋이 한명도 빠지지 않고 각종 의혹에 빠져 있는 가운데 친조카에서 처조카까지 친인척들이 수도 없이 사직당국에 끌려가는 모습을 보아야 하는 것은 대통령 자신뿐만 아니라 국민의 입장에서도 대단히 곤혹스러운 일이다. 측근들도 임기말을 앞두고 줄줄이 사법처리의 사정권 안에 들어갔는데 마침내 DJ의 정치적 산실인 동교동계의 좌장 권노갑씨까지 수모를 당하기에 이른 사건은 정치의 무상함을 다시 한번 일깨워 준다.

명색이 세계 12위 경제대국이라는 나라에서 언제까지 이런 후진적 정치행태가 계속되어야 하는가. 왜 아버지가 대통령이 되면 소득도 변변히 없는 아들이 최고급 BMW를 탄 왕자가 되어야 하고 유학을 갔다던 대통령의 다른 아들은 편도요금이 초임 근로자의 반년치 급여에 해당하는 특1등석을 타고 뻔질나게 귀국길에 올라야 했는가. 그가 항공기 침대좌석에 비스듬히 기대 하늘 아래 세상을 내려다보며 흑해산 캐비아에 프랑스산 샴페인으로 상승된 신분을 즐길 때 설마 오늘과 같은 비극이 땅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으리라 상상이나 했었을까.

마음대로 안 되는 것이 자식문제라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자식의 잘못으로부터 부모가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특히 2년 전부터 아들의 신분상승 놀음을 걱정하는 정보가 보고됐는데도 대통령이 앞장서서 그걸 막지 않은 것은 어떤 이유로도 정당화되기 어렵다. 대통령 친인척을 그대로 놓아두지 않는 주변인사들의 탐욕을 나무라기 전에 그런 유혹에 빠져들 수밖에 없을 만큼 훈련이 안된 친인척들의 도덕적 한계를 탓해야 한다.

여야의 대선후보들 가운데 자신이 당선될 것으로 믿는 사람이라면 정권의 끝자락마다 반복되는 이 어리석은 정치극의 교훈을 두 눈 똑바로 뜨고 지켜보아야 한다.

그런 전제 아래 말하자면 경선의 승리에 도취해 벌써부터 세상을 다 얻은 것처럼 행동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를 당사자들은 서둘러 깨달아야 한다. 대선으로 가는 과정일 뿐인데 경선 승리를 종착역쯤으로 착각한 나머지 이미 잔뜩 힘이 들어간 목소리로 할 말 안할 말 가리지 않고 해대는 사람은 아직 세상의 무게를 모르는 존재다. 교만이 얼마나 무서운 죄악인데.

비판적 신문의 부수를 100만부까지 떨어뜨리자는 투쟁적 선동을 보면서 우리는 신분이 상승해 이제는 세상의 무슨 일이든지 뜻대로 할 수 있다고 착각하는 여당 대권후보 측근의 만용을 읽는다. 무엇이든지 그렇게 막 대해도 되는 투쟁의 대상쯤으로 여길 때에 사나운 세상을 좋아하지 않는 국민은 불안한 미래를 예감하게 마련이다.

미국에 대고 우리나라 대선에서 손떼라는 말을 했다는 여당 대권주자의 또 다른 측근이 보여준 행동 역시 경선 승리에 취해 발이 땅에서 떨어졌음을 보여준다. 그런 국제적 쇼를 벌인 이유가 미국에 맞서는 용감무쌍한 대한민국의 정치전사임을 과시하고 싶었기 때문이라면 이런 사람들의 신분이 진짜 상승하는 날 어떤 일들이 일어날지는 충분히 상상이 간다.

아직 야당의 경선은 끝나지 않았지만 그쪽 역시 누가 선출되든 후보 주변에서 비슷한 일이 벌어질 가능성은 배제할 수 없다. 여야를 막론하고 대권주자의 주변 인물들은 지금부터라도 겸손하게 높아지는 방법을 연습해야 한다. 그것은 반복되는 우리 정치사의 비극을 단절하기 위해 요구되는 중요한 수양과정이기 때문이다.

이규민(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