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 세종 때의 일이다. 명나라에 간 우리나라 사신이 그 나라 고위관리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 임금이 밤낮으로 오랑캐들의 잦은 국경침범을 걱정하느라 당뇨에 안질까지 걸렸다. 좋은 약재가 있으면 좀 달라. 물론 임금의 건강을 걱정하는 차원이었다. 하지만 한양으로 돌아온 그에게는 온갖 비난이 쏟아졌다. 감춰야 할 기밀사항을 외국 관리에게 알려줬다는 것이다. 결국 그는 유배형에 처해져 낯선 땅으로 쫓겨났다. 좋은 뜻으로 한 말이 실언()으로 판결 나고 만 것이다.
동서고금의 역사를 통해 이 같은 실언으로 설화()를 입은 사람들은 셀 수 없이 많다. 우리나라의 경우 95년 당시 서석재 총무처장관의 4000억원 비자금 발언이나 98년 진형구 대검 공안부장의 조폐공사 파업유도 발언 등이 실언목록에 실린 대표적인 것들이다. 이들은 얘기를 꺼냈을 때만 해도 그 말이 엄청난 파괴력을 가질 것이라고 짐작도 못 했다. 이번 민주당 이해찬 의원의 병풍()수사유도 발언도 마찬가지다. 이 의원도 처음에는 이 말이 그처럼 대서특필()되고 정국의 분위기를 반전시키는 작용을 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실언도 종류가 가지가지다. 꺼내지 않아야 될 말을 불쑥 해버리는 경우는 물론 거짓말이나 험담, 내용을 잘 모르고 던지는 말도 모두 여기에 들어간다. 요즘 들어서는 이런 실언들을 통틀어 표현하는 오럴해저드(Oral Hazard)란 신조어도 생겨났다. 모럴해저드(Moral Hazard도덕적 해이)를 흉내낸 표현이다. 이 중에서도 가장 파문이 큰 것은 역시 감춰진 진실이 공개되는 경우다. 우리 사회에는 지금도 여전히 어둡고 구린 일일수록 쉬쉬하며 덮어두는 것이 관행처럼 여겨지고 있다. 그러고 보면 진실을 파헤치는 데 도움이 되는 실언()은 오히려 실언()으로 불러도 좋을 것만 같다.
성경의 잠언편에 이런 구절이 있다. 말이 많으면 허물을 면키 어려우나 그 입술을 제어할 수 있는 사람은 지혜가 있다. 본질적으로 정치인은 말을 먹고 사는 직업이고 따라서 그만큼 실언할 가능성도 높다. 앞으로 대통령선거전이 본격화되면서 수많은 말이 튀어나올 것이다. 이 과정에서 말 한마디 잘못했다가 회복불능의 설화를 입을 정치인이나 정파가 나올지 모른다. 누가 오럴해저드에 빠지는지를 지켜보는 것도 또하나의 대권 감상법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송영언 논설위원 youngeo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