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라톤이 혼자만의 싸움인 줄로만 알았어요. 그러나 주변의 응원이 없으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먼 이역땅에서 조국도 밝히지 못한 채 뛴 할아버지는 그 한걸음 한걸음마다 무엇을 생각하셨을까요.
손녀는 피를 증명했다. 고 손기정(19122002)옹의 손녀 은경씨(26일본 거주). 마라톤에 처음 도전한 그가 16일 열린 2003 동아서울국제마라톤대회에서 4시간32분의 기록으로 42.195 완주에 성공한 것이다.
골인 지점에는 함께 뛰다가 포기한 소설가 유미리(35)씨가 미리 와 서있었다. 30 부근에서 기권한 유씨는 손씨를 부축한 채 괜찮아?를 연발했다.
손씨와 유씨가 처음으로 만난 것은 1996년. 유씨는 일제강점기 마라토너였던 외할아버지 고 양임득(19121980)의 발자취를 찾아 손기정옹을 만났고 이 모습을 TV에서 본 손씨가 만나고 싶다는 편지를 보냈다. 두 사람은 곧 언니 동생 사이가 됐다.
지난해 유씨의 첫 동아서울국제마라톤 완주는 손씨에게 자극이 됐다. 유씨를 응원하기 위해 한국에 왔던 손씨는 유씨의 투혼에 감동을 느꼈다. 나도 하고 싶어요. 손씨는 지난해 10월 유씨가 연습 중인 도쿄 국립경기장 장거리 교실을 찾았다.
드디어 16일 오전 8시. 두 사람은 나란히 달리기 시작했다. 어, 유미리네, 옆은 동생인가? 시민들이 탄성을 터뜨렸다. 오똑한 콧날과 갸름한 얼굴이 자매처럼 닮아 보였다.
나란히 달리기를 세 시간여. 유씨가 손씨에게서 한참 멀어졌다. 유씨는 잠실역 부근에서 냉기가 온몸에 퍼져 안되겠다며 레이스를 포기했다.
이후 손씨는 걷다 뛰다를 되풀이하면서도 꼿꼿한 자세로 주위를 탄복시켰다. 손기정씨 손녀야? 다르긴 다르네! 부친 손정인씨는 딸이 일본에서 자라 정체성의 갈등이 컸다며 앞으로 어디서 살든 확고한 민족의 뿌리를 마음에 지닐 것이라며 대견스러워 했다.
손씨가 유씨의 부축을 받으며 숨고르기를 끝내자마자 두 사람은 한목소리로 말했다. 내년요? 둘 다 당당히 완주할 겁니다.
유윤종 gustav@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