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당의 거센 공격으로 내륙 오지로 쫓겨 간 중국 공산당은 대장정을 마쳤을 때 거의 궤멸 직전이었다. 그런데 129운동과 시안()사건이라는 천우신조의 기회가 주어졌다. 먼저 1935년 12월 베이징()의 대학생들이 거리로 뛰쳐나왔다. 공산당, 국민당으로 갈라져 싸우지 말고 함께 항일투쟁을 하자는 것이다. 이어 장쉐량()이 항일 독전차 시안을 방문한 장제스()를 감금하고 국공()내전의 종식을 요구한다. 당시로선 이들이 내세운 명분이 그럴듯했다. 민족화해를 해 외세를 먼저 몰아내자는 것이다. 그러나 이를 계기로 마오쩌둥()은 기사회생하고 전세는 역전되어 미국이 손을 뗀 중국대륙은 붉게 물들었다. 알고 보니 이들 사건의 뒤에는 노회한 공산당의 선무공작이 있었다.
30년의 세월이 흐른 뒤 인도차이나에서 비슷한 일이 다시 벌어진다. 월맹군이 시시각각 압박해 오는데 사이공의 젊은이들은 반전 반미 구호를 외치며 거리를 메운다. 이 같은 혼란은 가뜩이나 발을 빼고 싶어 하던 워싱턴의 여론을 미군 철수로 몰아버렸다. 공산화 이후 베트콩 선전조직은 본색을 드러내고 멋모르고 거리에 나섰던 순진한(!) 진보세력은 사상개조캠프로 보내졌다. 이들 중 많은 이들은 이미 붉게 물들어 수용소로 갈 필요가 없는데도 말이다.
1990년대 들어 필리핀에서 미군 철수 구호가 들렸다. 으레 그렇듯이 이념적으로 잘못 무장된 젊은이들이 소리를 높이고 보수는 침묵하니 밖에서 보면 필리핀 국민 모두가 미군 철수를 원하는 것처럼 보였다. 게다가 수비크만의 미군기지 주변 상인들까지 합세하고 나섰다. 미군이 떠나면 수비크기지에 외국의 투자를 끌어들여 멋진 복합단지를 만들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결과는 처참했다. 미군 철수 후 안보가 불안해진 나라에 투자하겠다는 외국 기업은 없었다.
세 나라의 쓰라린 경험은 사상전에 뛰어난 공산국가와 대처하고 있는 우리에게 이념적 해이가 가져올 엄청난 대가를 경고해 준다. 북한의 핵 위협 아래 진보와 보수로 맞서더니 이젠 상당수 국민이 평양에서 온 응원단에 환호하고 있다. 응원단의 미모에 매료된 우리 젊은이들이 북에 대한 막연한 환상을 갖게 되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다. 잘 훈련된 예쁜 북한여성 응원단을 볼 때마다 고통스러운 대장정을 하면서도 뛰어난 정치홍보로 농민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후일 승리의 기틀을 마련한 중국 공산당 선무공작단이 생각난다. 혹시 햇볕정책으로 북을 녹이겠다고 하다가 거꾸로 우리가 북의 뛰어난 사상전술에 먼저 녹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안 세 영 객원논설위원서강대 교수
syahn@ccs.seogang.ac.kr방형남논설위원 hnbha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