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3년, 제주도에서 일본 오사카로 혈혈단신 건너간 김준평(기타노 다케시)은 오직 폭력을 통해 자기 왕국을 구축한다. 그는 아내 이영희(스즈키 교카)를 수시로 강간하고, 딸과 아들에게 주먹을 날리며 가장으로 군림한다. 어묵 공장을 차린 김준평은 직원들을 착취해 큰 돈을 버는 한편 끊임 없이 여자들을 탐한다. 25일 개봉되는 재일 한국인 최양일 감독의 신작 피와 뼈는 극영화라기보다는 차라리 야수에 관한 차가운 다큐멘터리를 보는 것 같다. 재일 한국인 작가 양석일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이 영화는 김준평이 벌이는 폭력과 번식의 동물적 생존방식을 무표정하게 관찰할 뿐이니 말이다. 김준평은 비윤리적인 게 아니라, 아예 인륜의 개념 자체가 없는 다세포 생물 같다.
이 영화는 건조한 만큼 몸서리쳐진다. 김준평이 아들 다케시와 빗속에서 육체 대 육체로 맞붙는 장면은 우두머리 야수와 젊은 야수가 먹잇감과 암컷을 두고 벌이는 핏빛 쟁탈전을 떠올리게 한다. 아들은 아버지에게 새끼라며 먼저 주먹을 날리고, 아버지는 아들의 얼굴을 진흙 속에 짓뭉갠다. 결국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위계가 지속되는 건 단지 아버지가 아들을 힘으로 눌러 이겼기 때문이다. 이를 깨닫는 순간 관객은 슬프고 무섭다. 아무리 인간이라지만, 관계의 진실은 바로 이것이기 때문이다.
아들 마사오는 아버지를 증오하면서 아버지를 닮아간다. 아버지의 폭력에서 벗어나기 위해 결혼한 딸은 또 다른 수컷인 남편의 폭력에 희생된다. 우리에게 나쁜 피가 흐르면 어쩌지? 하고 조바심 내던 아들과 딸은 결국 아버지가 심은 저주스러운 DNA를 떨쳐버릴 수 없다. 그게 바로 자신의 피와 뼈에 박힌 운명의 본질이다.
김준평의 대사는 간결해서 더 겁난다. 김준평은 약육강식의 정글에서 먹고 싸고 자고 번식하는데 필수불가결한 말을 할 뿐이다. 그가 아내에게 던지는 첫 말은 김치!이며 여자를 앞에 두고는 단 한 마디만 한다. 벗어! 자신을 끊임없이 아버지라 부르는 자식들과 달리, 준평은 아들 딸 혹은 그들의 이름을 일절 부르지 않는다. 주먹을 휘두르며 다그쳐 물을 뿐이다. 내가 너한테 뭐냐? 내가 너한테 누구냐? 이 말은 질문이 아니라, 영원히 아버지 아닌 수컷으로 살겠다는 자신에 대한 야수적 맹세 같다.
피와 뼈는 단도직입적인 제목이 말하는 것처럼 전혀 영화적이지 않다. 어떤 형식적 미학적 성취에도 무관심하다. 이 영화는 2시간 22분 동안 주인공 김준평을 보여주기보다는 내버려 둔다. 그리고 이런 무책임을 가장한 냉혹한 태도 속에서 김준평이 뿜어내는 살기()는 스크린을 찢고 나와 관객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든다. 영화적 리듬과 구성을 거부하는 이 영화는 이런 방식을 통해 강력한 추동 에너지를 만든다.
기타노 다케시는 여전히 무표정이다. 하지만 이번에 그가 보여주는 인물은 내면에 뭔가를 강력하게 응축해 놓았던 기존 캐릭터와 다르다. 때려야겠으면 때리고, 죽여야겠으면 죽이고, 먹어야겠으면 먹고, 번식해야겠으면 섹스한다. 김준평 속에는 아무 것도 응축돼 있지 않다. 이 영화가 그래서 무섭다. 인간이 무섭다. 18세 이상 관람 가.
이승재 sjd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