맞다. 그 때는 다락방이 있는 집들이 많았다. 아이들은 거기 숨어서 만화책을 읽거나, 부모님께 실컷 혼난 뒤 내가 죽으면 엄마가 슬퍼할까라는 유치한 공상에 빠져들곤 했다. 그땐 그랬다. 김장때면 엄마는 마당 수돗가에서 100포기가 넘는 배추를 절이고, 가끔씩 골목길에 버려진 쥐약 먹은 쥐를 보고 지나가던 여학생들은 비명을 질렀다. 학교에서는 매주 월요 조회가 열리고 중간고사가 끝나면 극장에 가고 걸핏 하면 화장실 청소에 단체기합을 받아야 했다.
1979년 14살 소년의 아련한 성장기
사랑해, 말순씨(감독 박흥식)는 이렇듯 7080세대의 빛바랜 사진첩 같은 풍경을 들춰낸다. 1979년의 서울. 14세 소년의 눈으로 바라본 세상 이야기 속에는 따스한 가족애, 지나간 시간에 대한 추억과 그리움이 절절하게 묻어나온다. 인어공주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의 박흥식 감독은 이번에도 특유의 따스한 감성과 연민의 시선으로 인간미 넘치는 잔잔한 드라마를 엮어냈다. 눈물이든 웃음이든 일부러 감동을 쥐어짜내려는 과장된 포즈가 없기에 어쩌면 심심할 수도 있지만, 그만큼 편안한 마음으로 자연스럽게 추억여행에 동행할 수 있다.
시대 배경은 박정희 대통령의 서거부터 전두환 대통령의 등장이라는 역사적 격동기. 하지만 영화는 이와는 무심하게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빡빡머리 사춘기 소년 광호(이재응)의 일상에 초점을 맞춘다. 아빠가 사우디에 돈벌러간 광호는 화장품 외판원인 엄마 말순씨(문소리)와 여동생 혜숙과 산다. 문간방에서 세를 사는, 뽀얀 목덜미를 가진 은숙 누나(윤진서)에게 반한 광호는 평생 아름다운 그녀를 지켜주겠다고 다짐하고, 매일 자기 뒤만 쫓아다니는 동네 바보 재명이(강민휘) 때문에 인생이 꼬인다고 짜증도 낸다. 그러던 어느 날 행운의 편지가 날아온다. 편지를 받고 바로 똑같은 편지를 써 보내지 않으면 불행이 찾아온단다. 광호는 엄마와 은숙 누나, 재명에게 편지를 보내지만 모두 이를 무시한다. 그래서 그런 것일까. 광호에게 소중한 사람들에게 불운이 닥쳐오는 것은.
이 작품은 성과 세상의 슬픔에 어쩔 수 없이 눈떠가는 순수 소년 광호의 꿈과 그리움을 담은 성장영화다. 더불어 당시의 폭력적이며 억압적인 학교와 소외된 사람들의 삶도 담겨있다. 그래서 광호와 엄마의 관계를 포함해, 짝사랑 은숙 누나, 바보 재명이, 광호의 깡패 친구 철호 등 광호가 맺는 각각의 관계들은 386세대가 건너온 그 시대를 그려내는데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한 편의 영화에 네 갈래 이야기를 펼친 것이 욕심이었을까. 때론 영화의 큰 줄기인 엄마와 아들의 끈끈한 사랑에 집중하기가 힘들다.
아! 돌아갈 수 없어 아름다운 시절이여!
광호 역의 이재응을 비롯해 문소리 윤진서 강민휘 등의 연기는 두루 안정적이다. 영화 속 풍경과 소품을 꼼꼼하게 챙긴 감독의 탄탄한 연출력도 미덕이다. 개량형 한옥이 이어진 좁은 골목길에 쌓인 연탄재와 마당에서 훌라후프 돌리는 사람, 기와지붕 위에서 고추 말리는 아줌마 등을 스쳐지나가며 높은 데서 내려찍은 첫 장면을 비롯, 엄마의 홈웨어, 집안 곳곳에 놓인 살림살이, 소시지와 계란 후라이가 담긴 양은 도시락 등 곳곳에 담긴 디테일이 리얼리티를 살리고 재미를 더해준다.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시간이 가장 아름다운 시절이라고 했던가. 30, 40대에게는 너무도 기억에 생생하지만 이제는 어디서도 찾아보기 힘든 그 때 그 시절을 오롯이 복원한 이 영화가 울림을 주는 이유도 그럴 것이다. 3일 개봉. 12세 이상.
고미석 mskoh119@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