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3월 김왕규(당시 49세) 씨는 술을 마시고 귀가하던 중 동네 폭력배에게 맞아 쓰러져 병원 응급실로 옮겨졌으나 8시간 뒤 숨졌다.
김 씨 가족들은 부검에서 광대뼈와 갈비뼈가 부러져 있을 정도로 부상이 심했다는 게 드러났는데도 담당 의사가 환자를 취객으로 잘못 알고 6시간이나 방치하는 바람에 숨졌다며 병원 측을 상대로 소송을 냈다.
김 씨의 친척인 의사는 의료계 내부의 따가운 시선 때문에 1심 때 증언을 거부했으며 김 씨 가족은 패소했다. 김 씨 가족들은 의료사고를 다루는 한 시민단체의 소개로 알게 된 재미교포 의사의 도움을 받아 항소했다.
이처럼 해마다 의료사고 피해구제 신청, 관련 소송이 늘고 있지만 의료 소비자(환자)가 손쉽게 피해구제를 받을 수 있도록 하는 법안은 18년째 표류하고 있다.
한국소비자보호원(소보원)에 따르면 2000년 450건이던 의료사고 피해구제 접수 건수는 2001년 559건, 2002년 727건, 2003년 661건, 2004년 885건, 2005년 1093건으로 6년 사이 142% 이상 늘었다.
하지만 소보원은 피해구제를 위한 강제조정 권한이 없어 병의원 측이 조정안을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피해자들은 소송을 할 수밖에 없다. 이 경우 피해자들은 소송에 따른 경제적 정신적 부담을 져야 하며, 긴 소송 기간에 지치기 마련이다.
2001년 9월 콧속의 종양에 대한 치료를 받다 시신경이 악성 균에 감염돼 실명한 김모(29) 씨는 피해 배상을 거부하는 병원 측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해 1심에만 3년간 매달려야 했다.
소보원 이해각() 의료팀장은 의료 소송은 대법원 판결까지 평균 6년 정도 걸린다면서 의료사고 피해자들은 소송 때문에 이중고를 겪고 있다고 말했다.
사법연감에 따르면 의료사고 관련 소송 건수는 1999년 679건, 2000년 738건, 2001년 858건, 2002년 882건, 2003년 1060건, 2004년 1124건으로 해마다 크게 늘고 있다.
의료사고 피해자들은 전문 지식을 갖춘 의사들을 상대로 의료 과실을 입증하는 부담까지 져야 한다.
의료사고가족연합회 이진열() 회장은 의사의 과실을 입증하려면 다른 의사에게 감정을 의뢰할 수밖에 없다면서 의료계 내부의 시선을 의식한 의사들이 감정 의뢰에 잘 응해 주지 않아 어려움이 크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의사에게 의료행위 과실 여부에 대한 입증 책임을 지우는 법안이 1989년 이후 6차례나 발의됐으나 의료계와 시민단체, 정부 간의 의견 차이로 18년째 표류하고 있다.
지난해 12월 열린우리당 이기우(보건복지위) 의원은 이 같은 취지의 의료사고 예방 및 피해구제에 관한 법률안을 발의했으나 의료계 반발로 통과가 불투명한 실정이다.
이 의원은 환자가 가진 의료 정보량이 의사에 비해 턱없이 적기 때문에 의료 소비자가 절대적으로 불리한 상황이라며 의료 무과실 입증 책임을 의사가 지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종석 장원재 wing@donga.com peacechao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