끔찍하다. 생각만 해도 앞이 캄캄하다. 11m 러시안 룰렛게임. 승부차기를 마주한 골키퍼의 불안. 그러나 정작 더 불안한 것은 키커다. 골키퍼는 골을 먹어도 그만이지만, 키커는 못 넣으면 그 순간 역적이 된다.
1994년 미국 월드컵 결승 브라질-이탈리아전 승부차기. 브라질 3-2로 리드. 이탈리아 마지막 키커 로베르토 바조가 11m지점에 볼을 가져다 놓았다. 그때까지 바조는 16강 나이지리아전 2골(종료 2분전 동점골, 연장전 페널티킥 골 2-1 승), 8강 스페인 전 2골(선제골, 종료 2분전 결승골 2-1 승), 4강 불가리아 전 2골(2-1승) 등 이탈리아를 결승까지 이끈 1등 공신이었다. 브라질 골키퍼는 타파렐. 바조는 숨을 한번 크게 내쉬고 달려가 힘껏 내찼다. 하지만 아뿔싸! 그 슛은 그만 골대를 훌쩍 넘어가는 홈런 볼이 되고 말았다. 그 순간부터 바조는 이탈리아 국민의 공공의 적이 됐다. 멍청이가 됐다. 바조는 평소처럼 노리고 찼는데 왜 저런 곳으로 날아갔는지 모르겠다고 중얼거렸다. 승자 타파렐은 그래도 당신은 위대하다며 위로했다. 하지만 아무 소용없었다. 이탈리아 팬들은 싸늘했다. 바조는 내가 (나이지리아전) 페널티킥을 성공시킨 것은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다. 하지만 실축한 것은 언제까지나 기억 한다며 투덜댔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렇다. 승부차기는 결국 멘탈(mental심적인)게임이다. 이론대로라면 페널티킥이나 승부차기는 키커가 모두 이기게 돼 있다. 하지만 실전에서는 그렇지 않다. 게임 중엔 사각지대에서 펑펑 골만 잘 터트리던 킬러도 정작 승부차기에서는 똥 볼을 내지른다. 마음이 흔들린 것이다. 바조는 마음공부를 으뜸으로 치는 불교신자다. 그런데도 한순간 화두를 놓쳐버렸다.
이탈리아와 잉글랜드는 월드컵에서 승부차기 단골 패전국이다. 승부차기를 도입한 82년 스페인 월드컵 이래 3전 전패. 한번도 이기지 못했다. 오죽하면 이탈리아 언론들이 승부차기는 악마의 창조물이라며 진저리를 쳤을까. 브라질 프랑스는 2승1패. 스페인 1승 2패. 네덜란드 1패. 멕시코 2패.
승부차기 강국은 단연 독일과 아르헨티나다. 두 팀 모두 2002 한일 월드컵까지 3전 전승. 그 두 팀이 이번대회 8강전에서 승부차기 외나무 대결을 펼쳤다. 독일 승리로 월드컵 승부차기 4전 전승, 아르헨티나 3승1패. 독일선수들은 아이스 맨(ice man)이다. 얼음처럼 침착하다. 반면 이탈리아 스페인 멕시코 등 핏대들이 많은 라틴계열이 대체로 약하다.
축구공은 생물이다. 끊임없이 움직인다. 경기 중 슈팅은 대부분 살아있는 공의 엉덩이를 걷어찬다. 하지만 승부차기는 정지된 공의 옆구리를 윽박지른다. 죽은 공을 완강한 사각형의 골대 안으로 차 넣는다. 골키퍼는 바람이다. 키커는 바람에 마음을 읽히면 끝이다. 바람꽃에 마음을 도둑맞으면 골문은 칠흑이 된다. 인생도 그렇다. 물과 같이 담담해야한다. 담담한 물길 속은 아무도 모른다. 바람은 환상일 뿐이다.
김화성 mar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