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 양국 정상은 2003년 이후 6차례 만나는 동안 공동성명서(2003년 5월 워싱턴 회담)와 공동선언문(2005년 11월 경주 회담)을 채택해 공동의 약속을 담았다.
그러나 북한의 도발 및 한미 간 불협화음이 반복되면서 두 문건의 합의가 일부 깨지거나 훼손됐다. 물론 북한 핵 불용 원칙과 한미동맹의 기조까지 흔들린 것은 아니지만.
경주 공동선언의 명()과 암()=지난해 9월 19일 합의 다음 날부터 미국의 대북 경수로 제공 시점을 두고 삐걱거렸던 베이징() 6자회담 합의는 경주 공동선언을 통해 중요한 진전으로 평가됐다. 합의 내용에 제시된 조치를 취하겠다는 다짐도 나왔다.
그러나 북한은 6자회담을 외면했고, 미국이 이즈음 꺼내 든 금융제재만 물고 늘어졌다. 미국도 북한은 6자회담 복귀 의사가 없다고 결론지었다. 6자회담 활성화를 전제로 정전체제를 평화체제로 이행시킨다는 공동선언의 내용은 무색해지고 말았다.
경주 공동선언이 정확히 이행된 것은 장관급 전략대화기구의 출범. 두 나라는 올 1월 첫 회의를 열었고, 한국은 이 회의를 통해 필요하면 주한미군을 뽑아서 (다른 지역으로) 이동시킨다는 미국의 전략적 유연성 원칙에 동의했다.
실종된 워싱턴 공동성명의 추가 조치=노무현 대통령의 첫 미국 방문인 2003년 5월에 나온 공동성명은 동맹의 중요성을 유독 강조했다. 두 나라가 민주주의 시장경제 인권신장이라는 가치를 공유하며, 한미동맹과 주한미군이 동북아 평화번영에 역할이 크다는 점이 명시됐다.
눈에 띈 것은 북한의 위협이 커지면 추가 조치(further steps)를 한다는 문구. 당연히 새로운 압박조치를 가한다는 뜻으로 해석됐다. 2003년 5월 이후 북한은 핵보유 선언(2005년 2월)에 미사일 발사(2006년 7월)까지 해 가며 위협을 증대시켜 왔다. 그러나 두 나라가 구체적인 추가 조치에 합의한 것은 거의 없다.
인도적 차원의 대북 식량지원은 정치 사정에 영향 받지 않는다는 원칙도 합의됐다. 그러나 미국은 지난해 분배 투명성이 없다며 지원을 중단했다. 한국도 7월 북한의 미사일 발사 직후 정치 군사적 이유로 쌀 지원을 거부했다.
김승련 srki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