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가니스탄 탈레반 무장세력에서 풀려나 지난달 31일(현지 시간) 카불을 출발해 두바이에 도착한 피랍자 19명.
두바이 시내 두지트 두바이호텔에서 밤을 보낸 이들은 1일 오후 4시경 300여 명의 일반 승객이 모두 비행기에 오른 뒤 마지막으로 인천행 대한항공 KE952편에 몸을 실었다.
대한항공 측은 피랍자와 정부관계자들을 태우기 위해 평소 이 노선에 투입하던 296인승 에어버스 330-300 기종을 이날 하루만 보잉 747-400(335인승) 기종으로 바꿨다.
비행기 안에서 신문 탐독
2층 비즈니스클래스에 들어서자마자 이들이 가장 먼저 찾은 것은 신문이었다.
고세훈(27) 씨 등 피랍자 대부분은 기내에 마련된 국내 신문들을 자리로 가져가 꼼짝도 않고 오랫동안 탐독했다.
오후 5시 10분경 비행기가 이륙한 뒤 1시간쯤 지나 피랍자들을 인솔한 박인국 정부현지 대책본부장(외교통상부 다자외교실장)이 취재진들에게 3분간 피랍자들의 모습을 공개했다. 말을 걸지 않는 조건이었다.
차혜진(31), 김윤영(35) 씨 등 대부분의 여성 피랍자들은 제대로 잠을 못자 충혈된 눈에 눈물을 글썽였다. 또 안혜진(31) 씨는 불안한 듯 시선을 고정하지 못했다.
일행 중 가장 연장자인 남성 피랍자 유경식(55) 씨는 멍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가족과 눈물의 상봉
인천국제공항에 2일 오전 7시경 도착한 피랍자들은 샘물교회 박상은 장로가 의료원장으로 있는 샘 병원이 마련한 소형버스편으로 안양시 만안구 샘안양병원으로 이동했다.
오전 8시 반경 피랍자들은 이 병원 지하 샘누리홀에서 가족들과 마침내 만났다. 꿈에도 그리던 피붙이들의 얼굴을 보는 순간 가족들과 피랍자들은 눈물을 쏟아냈다.
지난달 13일 풀려난 김경자, 김지나 씨에게 석방기회를 양보했던 이지영(36) 씨는 울기만 하는 어머니 남상순(66) 씨의 눈물을 닦아주며 괜찮아. 엄마. 이제 괜찮아라는 말을 반복하며 자신도 눈물을 흘렸다.
먼저 풀려나 국군수도병원에 입원 중이던 두 김 씨도 상봉장을 찾아 자신들에게 석방을 양보한 이 씨를 끌어안고 흐느껴 보는 이의 마음을 뭉클하게 했다.
김윤영(35) 씨의 8세 된 딸과 6세 된 아들은 오랜만에 만난 엄마 품에서 한껏 어리광을 피웠다. 아들은 조그마한 손으로 지친 엄마의 어깨를 주물렀고, 초등학교 2학년인 딸은 엄마 이제 어디 안 간다고 약속해라며 새끼손가락을 건 채 풀지 않았다.
서명화(29) 경석(27) 씨의 아버지 서정배(57) 씨는 환한 미소로 두 남매를 반겼다.
서 씨는 아들을 향해 40여 일 동안 너희들 생각만 했는데 기다린 보람이 있다면서 환하게 웃었다. 앙상하게 야윈 경석 씨는 눈물을 흘리는 어머니의 등을 토닥이며 오히려 어머니를 달랬다.
대부분의 피랍자들은 오랜 긴장감이 한꺼번에 풀어지면서 피로가 몰려온 듯 가족들과 제대로 대화하지 못했다. 서로 껴안고 울먹이거나 가족들의 질문에 짧게 대답하는데 그쳤다. 한 여성 피랍자는 가족을 만나 흐느끼다가 정신을 잃기도 했다.
한편 숨진 배 목사의 형 신규(45) 씨도 이날 샘안양병원을 찾았지만 가족들이 만나는 자리에는 들어가지 않은 채 먼발치에서 이들의 만남을 지켜보기만 했다.
장기 치료 불가피
이들은 앞으로 샘안양병원 3층 전인 치유병동에서 종합검진과 치료를 받을 예정이다.
전인치유병동은 신체적인 질병은 물론 정신적인 상태까지 함께 치료받을 수 있는 곳. 피랍자들은 외부와 통제된 채 이곳에서 최소 2주간 치료를 받을 예정이다.
차승균(52) 샘안양병원 원장은 보통 15일 정도 피랍된 사람이 완전한 일상생활로 돌아가려면 34개월 정도 걸린다면서 전례가 없어서 정확한 치료 기간은 전문가들과 상의해 봐야겠지만 상당한 시간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한편 피랍자 가족들은 이날 명동성당에 감사방문을 다녀온 데 이어 4일부터는 신문사 등을 돌며 감사의 뜻을 전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