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기율표를 몰라도 대학 가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어요.
백성혜 교원대 교수는 4일 고등학교 화학 교과서의 문제점을 거론하며 화학 교과서에 가장 중요한 화학이 빠져 있다고 지적했다.
주기율표는 모든 원자를 양성자수 순서대로 배열한 것이다. 산소 원자 한 개가 수소 원자 두 개와 만나 물이 되는 이유 등 화학 반응과 결합의 원리를 깨치려면 주기율표 이해가 필수다.
그러나 현 고등학교에서는 문과생은 물론 이과생조차 주기율표를 잘 배우지 않는다. 화학에서야 주기율표가 나오는데 꼭 선택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백 교수는 화학자들이 이 문제를 제기하면 교육과정평가원에서는 늘 학생들이 어려워한다, 주기율표를 넣으면 화학 과목을 선택하지 않는다는 답이 돌아온다며 학생들의 흥미를 살린다는 명분에 쫓겨 더 중요한 것을 놓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왜가 사라진 화학 교과서
현재의 화학 교과서가 실생활을 소재로 사용해 학생들의 흥미를 불러일으킨 것은 평가받을 만하다. 학생들의 선택도 크게 늘어 화학은 가장 성공한 과학 과목으로 꼽힌다.
그러나 대한화학회의 한 회원은 화학 교과서는 화학책이 아니라 문학이나 미술에 가깝다며 지구과학이나 생물이 화학 교과서를 본받겠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안타깝다고 비판했다. 그는 과학이 과학인 이유는 현상 뒤에 있는 원리를 보여 주기 때문이라며 화학 교과서가 깊은 설명을 배제해 잡학만 늘어난 생각 없는 학생을 양산하고 있다고 말했다.
대한화학회는 대학교수를 중심으로 이과생들이 꼭 배워야 할 화학 참고서를 만들고 있다. 지금의 7차 교육과정에서는 원리를 자세하게 설명한 교과서 제작이 어렵기 때문이다. 서울대 화학과의 한 교수는 출판사의 간섭이 심해 다시는 교과서 제작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했다.
부정확한 이해와 공식 외우기
교과서에서 주기율표를 뺀 것처럼 깊은 설명을 꺼리고 쉽게만 설명하다 보니 오류도 종종 나온다. 화학 교과서의 묽은 용액 단원에 나오는 끓는점 오름 현상이 한 예다.
액체 용매(물)에 용질(소금)을 녹이면 끓는점이 섭씨 100도에서 올라간다. 많은 교과서가 용질이 액체의 표면을 덮어 액체의 표면적이 줄어들고 이 때문에 용매 입자가 공기로 덜 튀어 올라 끓는점이 오른다고 설명한다.
백 교수는 그 설명이 사실이라면 목이 좁은 병에 물을 넣으면 표면적이 줄어드니까 끓는점이 오르지 않겠느냐고 반문했다. 쉽게 설명하려다가 잘못된 비유를 들거나 설명이 누락됐다는 것이다.
그는 학생들이 제대로 된 이해 없이 복잡한 공식을 배우는 데 급급하다며 쉬운 교과서가 화학의 계산화를 낳고 있다고 아쉬워했다.
2000년 학업성취도 국제비교연구(PISA)에서 세계 1위였던 과학 성적이 2006년 57개국 가운데 11위로 추락한 것도 이처럼 원리에 대한 깊은 이해가 부족한 탓이라는 지적이다.
18세기에 갇힌 교과서
고등학생들이 화학에서 많이 혼란스러워하는 개념 중 하나가 원소와 원자의 차이다. 대다수 교과서에 따르면 원소는 더 이상 나눠지지 않는 순수한 물질이다. 이것은 원자가 등장하기 훨씬 전인 17, 18세기 개념이다. 원자가 등장하면서 원소는 같은 종류의 원자끼리 모인 물질로 바뀌었다. 원자가 전자와 양성자로 잘게 쪼개지면서 현대에 와서는 원소의 정의가 양성자수가 같은 원자가 모인 물질이 됐다.
한 화학과 교수는 원소를 원자에 대한 설명 없이 과거 개념인 순수한 물질로 정의하다 보니 뒤에 나오는 동위원소는 전혀 다른 개념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화학의 기본개념인 산과 염기도 시대에 따른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염기에 대해 중학교 때는 수산화이온(OH-)을 내놓는 물질로 배운다. 그러나 고등학교에서는 수소이온(H+)을 받아들이는 물질로 정의가 바뀐다. 대학에 가서는 전자쌍을 줄 수 있는 물질로 다시 변한다. 대학으로 갈수록 최신 정의를 배우는 셈이다.
한 화학자는 전자쌍은 어려운 개념이 아니다라며 중학교라면 몰라도 고교 교과서에는 최신 정의를 싣는 게 대학에서 혼란을 줄이는 방법이라고 지적했다.
김상연 drea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