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별세한 금아 피천득은 수필 인연에서 생전 아사코를 세 번 만났다. 세 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을. 허나 그도 봐도 봐도 또 보고픈 이가 있었다. 평생 애지중지했던 딸 피서영 미국 보스턴대 교수. 그리고 외손자인 바이올리니스트 스테판 재키(22) 씨였다.
25일은 금아가 세상을 뜬 지 1년이 되는 날. 재키 씨는 이날을 기려 생전에 일주일에 한 번씩은 꼭 통화했다는 할아버지에게 편지를 썼다. 글에 서명한 자신의 이름도 스테판 피 재키(Stefan Pi Jackiw)였다.
할아버지는 떠났지만 손자는 다시 한국을 찾는다. 다음 달 28일 비올리스트 리처드 용재 오닐이 리더로 있는 클래식 프로젝트 앙상블 디토(Ditto)에 참여해 서울 예술의 전당에서 리사이틀을 갖는다. 피는 그렇게 이어진다.
할아버지.
어린 시절 우리 가족은 거의 매년 한국에서 여름을 보냈습니다. 정확한 기억은 네 살 때부터입니다. 할아버지와 카드놀이를 하고, 공원을 산책하고, 미술관 박물관에도 갔죠. 단둘이 식당에서 점심을 먹기도 했습니다. 어딜 가도 사람들이 할아버지를 알아보고 인사했었죠.
당신께선 정말 음악을 사랑하셨습니다. 영화 아마데우스는 할아버지와 제가 정말 좋아했던 영화였습니다. 매일매일 보고도 질리지 않았죠. 잠자리에 들 때도 내일 할아버지와 또 봐야지 하며 기대에 부풀곤 했습니다. 영화 속 대사도 거의 다 외울 정도였어요.
혹시 기억하세요? 젊은 시절 로맨스도 얘기해 주셨잖아요. 어느 어여쁜 여성 작곡가와의 사랑 얘기였습니다. 그분이 할아버지의 시에 곡을 붙여줬다고 말씀하신 기억도 납니다.
미국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Robert Frost)가 친필 서명한 책을 아끼신 것도 생각납니다. 195556년 풀브라이트 장학생으로 하버드대에 체류할 때 친하게 지내셨다죠? 프로스트는 극동에서 온 자그만 신사와 영문학이나 서구 문화에 대한 얘기 나누는 걸 즐거워했다고 하셨죠. 제게 주신 그가 서명한 책은 아직도 간직하고 있답니다.
함께한 몇 차례의 유럽여행도 행복했습니다. 로마에서 미켈란젤로의 피에타를 보고 감격하시던 모습도 선합니다. 할아버지 서재에는 제자가 선물했다는 피에타 사본이 걸려 있었죠. 아름다운 베네치아도 좋아하셨지만, 곤돌라는 무섭다며 절대 타지 않으셨죠.
아일랜드도 기억납니다. 당신께서는 평생소원이 이뤄진 순간이라고 말씀하셨죠. 아일랜드는 시인 예이츠(W. B. Yeats)의 나라라면서. 더블린 무덤가에 새겨진 비문은 꼭 외우라고 당부하셨죠. 삶과, 죽음을, 냉정히 바라보라, 길손이여, 지나가라(Cast a cold eye on life, on death, horseman, pass by).
영국 케임브리지대에선 스티븐 호킹 박사도 만났습니다. 할아버지는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하셨죠. 참, 그때 할아버지가 사라져 부모님이 얼마나 걱정했던지. 연로하신 분이 혼자 몇 시간씩 교정을 걸으셨다니. 에스컬레이터도 무서워하시면서.
할아버지가 쓴 수필 서영이에는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다행히 내가 오래 살면 서영이 집 근처에서 살겠다. 그 애의 아이 둘이 날마다 놀러 올 것이다. 서영은 어머니 이름이죠. 하지만 할아버지와 우린 3000마일쯤 떨어져 살았습니다. 그래도 당신께서 원하셨던 행복한 시간을 우린 함께 보냈다고 믿습니다.
아쉽게도 열두 살 이후엔 한국에 갈 수 없었습니다. 바이올린 공부로 시간을 낼 수 없었죠. 하지만 영어로 번역된 할아버지의 시와 수필은 모두 읽었습니다. 아시죠? 할아버지의 존재는 제가 이렇게 당당한 젊은이로 성장하는 밑거름이었습니다. 거문고를 잘 타시던 어머니의 재능을 네가 대물림했구나라던 당신의 말씀이 귓가에 생생합니다.
할아버지, 전 오랜 소원이 하나 있었습니다. 서울에서 할아버지 앞에서 공연하는 것이었습니다. 2006년 그 바람을 이뤘죠. 서울시향의 초대로 이뤄진 한국에서의 첫 연주. 그게 당신을 뵌 마지막이었습니다. 말씀드렸던가요. 그때 앙코르곡 쇼팽의 야상곡은 할아버지를 위한 것이었어요.
할아버지는 전화로 자주 말씀하셨습니다. 난 축복받은 삶을 살았다고. 할아버지, 당신도 제겐 축복이었습니다.
정양환 ra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