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5년 10월 8일 오전 5시 반, 괴한들이 긴 사다리를 타고 경복궁 담을 넘었다. 이들은 광화문으로 달려가 문을 열었고 수십 명의 일당이 경복궁으로 난입했다. 이들은 궁 북단의 건청궁()까지 한달음에 달려가 고종의 처소인 장안당()과 왕비 민씨의 처소인 곤녕합()을 한순간에 아수라장으로 만들었다.
괴한들은 대원군의 입궁을 소리쳐 왕과 궁인들을 당황스럽게 만들었고, 그 틈에 일부는 곤녕합으로 침입했다. 왕은 장안당의 마루로 오르려는 자들을 직접 가로막았지만 괴한들은 왕의 어깨마저 함부로 밀쳤다. 이때 곤녕합에서는 왕비가 궁녀들과 함께 장안당과 연결된 복도로 들어섰다. 좁은 복도를 다 지나 왕이 있는 장안당 마루 입새에 이르렀을 때, 뒤를 쫓던 괴한 중 하나가 왕비의 덜미를 잡았다. 그리곤 뒤뜰로 끌어내린 뒤 칼로 내리쳤다. 칼을 휘두른 장본인은 낭인이 아니라 일본 육군 소위 미야모토 다케타로()였다는 사실이 최근 새로 밝혀졌다. 일왕의 명령을 따르는 일본 군부가 을미사변을 일으킨 것이다.
지난해 12월 29일 건청궁에는 그 비극을 감싸 위로하려는 듯 눈이 내리고 있었다. 괴한들의 침입도(사건 당시 우치다 사다쓰치 일본영사가 작성)와 비교하며 둘러본 장안당의 뒤뜰과 곤녕합의 복도는 100여 년 전의 역사를 제대로 직시하라고 요구했다.
대본영의 지시로 왕비 시해
괴한들은 왕비의 시신을 곤녕합의 옥호루()로 옮겨 사진과 얼굴 대조를 마친 뒤 시신을 곤녕합 옆의 녹산()으로 옮겨 나무더미를 쌓고 태웠다. 타고 남은 시신을 건청궁 앞에 있는 연못 향원정에 던졌지만 곧 수면으로 떠올라 다시 거두어 녹산 자락에 묻었다.
최근 재일동포 여류사학자 김문자 씨는 일본 군부 자료를 바탕으로 집필한 연구서 조선 왕비 살해와 일본인에서 일본군 최고사령탑인 대본영()이 왕비 살해를 지시한 사실을 밝히고 있다. 현장을 지휘한 것은 8명의 육군 장교들이었다. 지금껏 장사꾼 또는 낭인들의 소행으로 알려진 것은 연막이었다.
조선 침탈의 시작, 운요호 사건
일제의 조선 침략은 을미사변 20년 전인 1875년 운요호 사건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868년 일왕 옹립 후, 유신세력이 가장 먼저 창설했던 해군은 1874년 대만 사건에 이어 1875년 9월 운요호 사건을 일으켜 조선 침략 야욕을 드러냈다.
2002년, 그간 일본 방위청 자료관에 깊이 묻혀 있던 운요호 함장의 제1차 보고서가 서울과 일본 도쿄에서 논문을 통해 동시에 공개됐다. 보고서는 지금까지 알려진 운요호 사건의 내용이 거짓이었음을 그대로 드러냈다. 이 배는 일본의 주장과는 달리 처음부터 국기를 달고 있지 않았다. 조선 포대의 발포는 정당한 것이었다. 일본 외무성은 도쿄 주재의 서양 외교관들의 사건 설명 요구에 대비해 나가사키에 있던 함장을 불러올려 보고서를 고쳐 쓰게 했다. 중국 랴오둥()으로 가던 중 식수가 떨어져 국기를 달고 접근하였다는 거짓 내용은 이때 들어갔다.
역사의 진실이 감추어진 근대 한일관계사는 여전히 많다. 가해자가 진정한 사과를 하지 않는 상황에서 피해자가 피해 사실을 제대로 정리해 두지 않으면 화해의 의미도 그만큼 빛을 잃을 수밖에 없다.
청일전쟁 직전에도 궁중 침입
일본은 청국과의 일전을 위해 1889년 징병제를 개정해 병력 규모를 3만 명에서 36만 명으로 대폭 늘렸다.
1894년 초여름 동학농민군 봉기 진압 명분으로 양국의 동시 출병이 이루어졌다. 이때 일본군 1개 혼성여단(8000명)은 동학군의 활동 근거지인 전북 전주 쪽이 아니라 서울로 향했다. 농민군 봉기에 대한 근본 대책으로 조선 정부에 내정 개혁을 요구하기 위한 것이었다.
조선 정부는 이에 강력히 반발했다. 일본 측은 회유를 거듭하다가 7월 23일 0시 30분을 기해 여단 병력이 도성을 둘러싼 가운데 1개 대대 병력을 경복궁 안으로 투입해 왕을 포로로 삼다시피 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대륙 침략을 위한 준비
일본군은 1894년 6월 5일 동시 출병 때 이미 청국과의 전쟁을 각오하고 대본영을 설치했다. 1895년 4월, 전쟁은 일본의 승리로 끝났다. 전쟁이 끝났는데도 일본군은 철수를 꺼렸다. 일본 군부는 전신선 관리를 위해 1개 대대 규모 이상의 병력을 주둔시키기를 바랐다. 조선 국왕과 왕비는 이를 거부하고 전면 철수를 요구했다. 이에 대본영은 육군 중장 출신의 미우라 고로를 조선 공사로 임명하고 그에게 왕비 살해의 밀명을 내렸던 것이다.
을미사변을 전후로 한 일련의 사건은 일본 군부가 주도했음이 명확하다. 국력의 쇠약은 우리 왕과 왕비의 안방까지 군홧발에 짓밟히는 전대미문의 사건으로 이어졌다. 사건이 있은 지 한 세기가 넘었지만 건청궁의 뒤뜰과 복도, 녹산의 기슭은 비운의 역사를 되풀이하지 말라고 외치고 있다. 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근현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