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이 신문 보고 이런 거 있다고 알려줘서 왔어요. 먹고살려니 아무 일이라도 해야지요. 그런데 연락은 언제 주시나요? 제발 도와주세요.
4일 오전 10시경 서울 강남구 논현동 한국토지주택공사(LH) 서울본부에 차려진 노인 일자리 접수창구에서 백발이 성성한 한 노인이 직원의 질문에 답하며 구직을 호소하고 있었다. 면접관이 그런데 어르신, 몸 불편하신 데는 괜찮으세요? 서류에는 4급 장애인으로 돼 있던데라고 묻자 긴장한 표정의 이 노인은 어릴 때 앓아서 관절이 좀 아프지만 평소 등산을 열심히 해서 건강에는 큰 문제가 없다. 시켜준다면 뭐든지 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의 뒤에는 10여 명의 노인이 저마다 A4 용지에 빽빽하게 써 온 자기소개서를 들고 차례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LH는 2일부터 5일까지 60세 이상 실버사원을 뽑는 채용 접수를 했다. LH의 전국 임대아파트 단지에서 단지 시설관리와 주거복지 보조업무를 담당할 시간제 직원을 뽑는 것. 6개월 동안 하루 4시간씩 일하고 월급은 50만 원을 받는 조건이다. 현장에서 접수업무를 담당한 LH의 직원들은 노인들의 경제문제가 심각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많은 지원자가 찾아올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집계 결과 전국적으로 2000명을 뽑는데 나흘 동안 2만2107명(경쟁률 약 11 대 1)이 원서를 냈다.
생활고가 주된 구직 동기
이날 접수창구를 찾은 변모 씨(73)는 면접관들에게 자신의 딱한 사정을 호소했다. 그는 지방에서 공무원을 하다가 은퇴한 뒤 공인중개업을 해봤지만 부동산시장에 찬바람이 불면서 얼마 전에 결국 문을 닫았다. 고객들이 상대적으로 젊은 중개사를 선호하면서 손님이 끊긴 것도 이유가 됐다. 변 씨는 자녀를 늦게 낳아 20대 아들, 딸을 두고 있지만 자녀들이 아직 취업을 못했다며 결국 집에서 내가 혼자 벌어야 되는데 여기저기 일자리를 구하려 해도 노인이다 보니 어렵다고 한숨지었다.
면접장을 찾은 노인들은 작은 용돈벌이나 소일거리보다는 당장 먹고사는 문제로 일자리를 간절히 구하는 경우가 많았다. 송모 씨(71)는 노인복지회관에서 도시락 배달 일을 했는데 얼마 전에 다른 노인들보다 사정이 좀 낫다는 이유로 일자리를 잃었다며 경쟁률이 생각보다 높아서 이번에도 일자리를 얻기는 어려울 것 같다고 아쉬워했다.
이날 접수창구엔 등산복을 입은 할아버지들과 면접을 위해 곱게 화장을 한 할머니, 심지어 나이가 90대인 노인도 보였다. 서울 송파구 거여동에 사는 이모 씨(77)는 컴퓨터를 사용할 줄 몰라서 어제 밤새워 지원서를 세 번이나 다시 썼다며 들고 온 지원서류를 보여줬다.
70대 이상도 30% 넘어
노인들의 구직 열기는 대도시일수록 뜨거웠다. LH의 서류접수 결과 서울이 16.7 대 1로 경쟁이 가장 치열했고 대구경북(11.9 대 1) 부산울산(11.5 대 1) 등 도시지역의 경쟁률이 높았다. 특히 저소득 노인이 많이 사는 서울 관악동작구는 15명 모집에 770명이 몰려 경쟁률이 51 대 1까지 치솟았다. 신청자의 연령대도 70대 이상이 31%로 구직전선에는 나이의 많고 적음이 큰 의미가 없다는 것을 보여줬다.
최근 정부통계 등에 따르면 한국의 노인 자살률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1위로 자살 원인은 경제적 어려움이 33.9%나 차지한다. 전문가들은 일자리를 통해 빈곤 문제만 해결하더라도 상당수의 노인 자살을 예방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
황형준 유재동 constant25@donga.com jarret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