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1958년 1월 당시 김일성의 이론서기라는 직책으로 조선노동당 서기실에서 일을 시작한 이후 1997년 노동당 국제담당 비서로 일할 때까지 근 40년 동안 북한에서 다양한 직책을 수행했지만 내적인 본직은 시종일관 당의 지도사상을 관리하는 일이었다. 이 과정에서 나는 북한의 지도사상인 주체사상이 변질되는 과정을 목도했다. 또 독재의 소용돌이 속에서 정치의 본질을 깊이 들여다 볼 수 있었다. 평생 철학자로 살아온 나에게 철학은 인생의 모든 것이었다.
나의 철학은 인간중심철학이다. 인간중심철학은 가장 보편적인 원리에 의거해 인류의 운명 개척의 길을 밝혀주는 학문이다. 인간의 운명이란 인간이 생존하고 발전하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은 누구나 살며 더 잘살 것을 요구한다. 더 잘사는 것이 바로 인간의 운명이 개척돼 가는 것이다. 따라서 철학은 모든 활동과 실천의 종국 목적인 인간 운명 개척의 요구에 이바지해야 한다. 이것이 나의 인간중심철학의 출발점이다.
김일성 주체사상을 만들다
이 철학에 이르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다. 철학에 심취한 학창 시절을 거쳐 중앙당 서기실의 이론서기로 일하게 되면서 나의 철학 인생은 주체사상과 밀접한 관련을 맺게 된다. 서기실은 1958년 김일성이 처음으로 주체는 조선혁명이다라는 명제를 제기했던 연설(1955년 12월 28일 선전 일꾼들에게 한 연설)을 정리해 발표했다.
1959년부터 중-소 이념논쟁이 본격적으로 불붙었다. 나는 중-소 간의 논쟁에 큰 충격을 받았다. 공산주의자들이야말로 권력욕이 강하며 권력을 위해서는 사상이나 이론의 정당성에 관계없이 그것을 저들의 이익에 맞게 해석하고 있음을 깨닫게 됐다.
날이 갈수록 논쟁이 격화되자 김일성은 우리도 주체를 더욱 튼튼히 세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일성은 두 대국 간의 대립을 이용해 자신의 지위를 더욱 확고히 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천리마운동을 대대적으로 펼치고 선전했으며 경제 문화 건설에도 자주적인 노선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김일성은 모스크바에서 열린 81개국 공산당 회의 결과를 김일이 국제전화로 보고하자 우리가 백두산에 다시 들어가 감자를 캐먹으면서 유격투쟁을 할지언정 소련의 대국주의 압력에는 절대로 굴하지 말라고 지시했다.
이때의 주체사상은 큰 나라들을 무조건 숭배하고 자기 나라를 깔보는 사대주의와 큰 나라의 것을 기계적으로 모방하는 교조주의를 반대하면서 구체적인 실정에 맞게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창조적으로 적용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나는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구체적 실정에 맞게 적용하는 창조적 입장과 함께 사대주의를 반대하고 자주의 입장을 지키는 것을 주체사상의 기본 요구의 하나로 덧붙이게 됐다. 1963년 최용건의 아프리카 방문을 계기로 나는 주체사상을 군중노선에 기초해 체계화했다.
이런 과정을 통해 1960년 전반까지 김일성에 의해 정립된 주체사상의 기본내용은 한마디로 스탈린주의를 민족주의와 결부시킨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스탈린 개인숭배 대신 그 자리를 좀 더 봉건화된 김일성 개인숭배가 차지하게 됐으며 스탈린주의 간판 대신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창조적 적용이라는 주체사상의 간판을 내걸고 김일성 독재가 실시된 것이다.
김정일과 수령 절대주의 사상의 출현
당시 김정일은 대학을 졸업하고 중앙당에 들어와 아버지의 사업을 도우면서 본격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당시 제2인자의 자리에 있던 삼촌 김영주와 권력 쟁탈전을 벌이고 있었다. 김정일과 김영주의 권력 쟁탈전은 김일성 개인숭배의 정도를 누가 더욱 높여 김일성으로부터 후계자의 자격을 인정받느냐는 경쟁이었다.
김영주는 김일성에게 충실했고 정치적 능력도 있는 사람이었지만 마르크스주의 원칙을 지키려는 일면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김정일은 자기의 권력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성격이었고 이런 면에서 머리가 빨리 돌고 무자비했다. 김일성이 김영주를 버리고 김정일을 후계자로 정한 것은 그의 가장 큰 과오라고 할 수 있다.
1967년 (김일성이 유일사상체계를 강화하기 위해 지식인들을 대대적으로 탄압한) 이른바 525 교시를 계기로 김영주와의 권력 투쟁에서 김정일의 승리는 확정적인 것이 됐고 스탈린주의 독재의 테두리에 있던 김일성 독재는 수령절대주의 독재로 전환됐다. 수령절대주의는 김정일이 창안해낸 전대미문의 반인민적 독재사상이라 할 수 있다.
수령이 공산당원들 가운데 가장 탁월한 사상이론과 영도예술을 소유한 지도자이기 때문에 공산당의 이익을 대표해 노동계급의 이름으로 독재를 실시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수령이 공산당과 노동계급에 생명을 준 어버이이기 때문에 독재정권의 모체가 된다는 사상이다. 이것은 어느 나라 공산당에서도 생각할 수 없었던 최악의 독재사상으로서 결국 봉건적 세습제까지 부활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김일성 자체의 변질
김정일이 김일성의 업적을 과장해 투쟁 역사를 위조하고 개인숭배를 제도화생활화하도록 강요하면서 김일성도 부정적 방향으로 급속히 변질되기 시작했다.
그는 자기가 타고난 인민의 지도자인 것처럼 자고자대()했으며 모든 것을 김정일에게 맡기고 국가사업에 책임지려 하지 않았다. 자기를 과신한 나머지 공인된 국제관계와 관련된 역사마저 부정하고 자의적으로 왜곡하는 것조차 서슴지 않았다. 그는 고구려 시조 동명왕이 중국 진시황보다 200년이나 뒤떨어져 건국했다는 것은 민족적 수치라며 역사학자들에게 동명왕이 진시황보다 먼저 건국한 것으로 고치라고 하는 등 역사를 다시 썼다.
세습제가 공산주의 운동에서 허용될 수 없을 뿐 아니라 김정일의 사람됨이 인민의 지도자로서 적합하지 않다는 것이 누구의 눈에도 명백했으나 김일성은 자기 고집대로 세습적으로 국가 정권을 물려줌으로써 돌이킬 수 없는 엄중한 과오를 범하는 데까지 이르게 됐다.
계급주의에서 인간본위 사상으로
1960년 모스크바 81개국 공산당 회의에 참가해 1개월에 걸친 치열한 논쟁을 지켜보면서 나는 수령 숭배와 수령 독재의 뿌리가 바로 계급적 본성을 인간의 본성으로 보는 마르크스의 계급주의 사상과 결부돼 있다는 것을 절감했다. 이것은 내가 계급주의적 입장을 버리고 자유롭게 살며 발전할 것을 바라는 삶의 요구를 인간의 본성으로 인정하는 인간본위적 입장에 서게 하는 사상적 전환의 계기가 됐다.
후 인간의 본성이 무엇인가의 문제를 푸는 데 결사적 각오로 달라붙었다. 나는 여기서 내가 왜 자주적 입장과 창조적 입장을 생존을 위한 방법론으로만 생각하고 그것이 바로 인간의 본질적 속성의 발현이라는 것을 생각하지 못했는지 스스로 심각하게 비판하게 됐다.
나는 자주적 입장과 창조적 입장이 인간 본성의 발현밖에 다른 것이 될 수 없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 나의 사상은 인간의 사회적 운동의 특징에 대한 인식으로부터 운동의 주체인 인간 존재의 특징에 대한 인식으로 전진했던 것이다. 이것은 나의 사상 발전에서 일대 전환이었으며 바로 이것이 인간중심철학의 출발점이라고 볼 수 있다.
나의 사상은 인간이 세계에서 차지하는 자주적 지위와 창조적 역할이 높아진다는 것은 세계의 주인, 자기 운명의 주인으로서의 지위와 역할이 높아진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데로 더욱 전진하게 됐고 드디어 세계의 주인, 자기 운명의 주인으로서 끝없이 발전하는 것이야말로 인간의 종국적인 삶의 목적이라는 것을 깨닫게 됐다.
한국에서 꽃피운 인간중심철학
내가 1997년 2월 북한을 나온 이유는 오로지 김정일 독재체제를 타도할 준비를 하기 위해서였다. 철학자인 나는 북한을 민주화할 가장 큰 무기는 바로 북한 인민들이 올바른 사상을 갖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한국에 가면 내 필생의 산물인 인간중심철학을 체계화해 널리 알릴 생각이었다.
나는 철학이란 이론적 정치이고 정치란 실천적 철학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한국에 온 이후 지금까지 북한의 처참한 실상을 널리 알리고 북한 민주화 투쟁을 위한 다양한 조직들을 만들어 운영하는 한편 인간중심철학을 체계화하는 작업에 몰두해 왔다. 또 다양한 형태의 글과 강연 등을 통해 북한 김정일 체제를 비판하고 북한 민주화 및 개혁개방, 남북문제 해결 방안 등을 제시했다.
신석호 kyl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