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에 누구나 한 번쯤 꾀병을 부렸던 기억을 갖고 있다. 하기 싫은 일이나 심부름을 해야 할 때, 숙제를 하지 않은 상태로 학교에 가야 할 때 갑자기 배가 아프다 머리가 아프다며 칭병()을 했던 일은 세월이 훌쩍 지난 뒤 아련한 추억이 되기도 한다. 조선시대에는 선비가 소신을 지키기 위해 관직을 떠나려 할 때나 벼슬을 사양할 때 많이 쓰던 핑계가 칭병이나 병든 부모를 돌봐야 한다는 것이었다.
요즘은 비리 혐의로 수사와 재판을 받는 기업인과 정치인들이 칭병을 즐겨 쓴다. 병원 신세를 지고 있다고 법원에 호소하면 병보석으로 풀려날 수도 있고 집행유예를 선고받는 경우도 많기 때문일 것이다. 2007년 9월 영국 파이낸셜타임스가 한국 재벌 총수들은 곤란한 일이 생기면 휠체어를 탄다고 보도한 적이 있다. 한국에서는 유난히 재벌 총수들이 휠체어를 타고 재판을 받는 경우가 많고 사법부가 이들에게 관대한 판결을 내린다고 비꼬는 내용이었다. 실제로 정몽구 현대기아차그룹 회장은 2006년,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은 2007년 재판 때 환자복을 입고 휠체어를 탔다. 칭병 전략이 효과가 있었는지 이들은 모두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 정태수 전 한보 회장, 박연차 전 태광실업 회장도 환자복 차림에 휠체어를 타고 법정에 나갔다. 박 전 회장은 올 1월 항소심에서 징역 2년 6개월의 실형을 선고받았지만 병보석으로 풀려났다. 현재 고향에서 정월대보름 쥐불놀이를 할 정도로 자유롭게 산다. 휠체어를 탄 정치인으로는 박지원 민주당 원내대표를 빼놓을 수 없다. 그는 2004년 현대 비자금 사건 재판 때 반백의 헝클어진 머리에 녹내장 수술을 받은 눈에 안대를 하고 마스크를 쓴 채 링거 주사기까지 팔에 꽂아 매우 불쌍한 모습을 연출했다.
청탁의 대가로 수십억 원을 받은 혐의로 피의자 신세가 된 천신일 세중나모여행 회장이 도피 중인 일본에서 받은 정밀 건강검진 결과를 검찰에 보내왔다. 의사 소견은 입원 또는 통원 치료가 필요하다는 것이지만 검찰은 천 회장이 바로 귀국해 조사를 받기에 무리가 없다고 판단하고 있다. 천 회장이 국내 병원에서는 치료가 불가능한 희귀한 병에 걸린 게 아니라면 즉각 귀국해 조사도 받고 치료도 받아야 한다. 천 회장의 경우 해외도피용 칭병이란 의심을 피하기 어렵다.
권 순 택 논설위원 maypol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