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의 공약을 다루는 태도에 변화가 감지되고 있다. 박 대통령은 9일과 16일 대통령수석비서관 회의를 주재하면서 현실과 괴리가 있는 공약은 수정하고, 실현 가능성이 낮은 공약은 무리하게 추진하지 말라는 취지로 주문했다고 한다. 실수요가 미미한 목돈 안 드는 전세대출 공약이 다른 상품과 통합하면서 사실상 폐기되고, 이해 관계자들의 반발이 큰 행복주택 공약이 20만 채에서 14만 채 건설로 대폭 축소된 것도 그 일환이다. 부정적 시각이 강했던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사무처의 부활을 수용한 것도 상황에 따라 대처하는 유연성을 발휘한 것이다.
대선 공약도 국민과의 약속이니만큼 최대한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정치인의 도리다. 그러나 모든 공약을 무리하게 지키려들다가는 약속 이행으로 얻는 득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잃을 수도 있다. 공약을 만들어 국민에게 제시할 때 신중을 기해야 함은 두말할 필요가 없지만 공약 중에는 국가의 재정 형편이나 현실 적합성, 예기치 못한 외부 변수의 발생 등으로 수정이나 폐기가 불가피한 경우가 생길 수밖에 없다고 본다.
박 대통령은 원칙과 신뢰, 약속 이행을 중시하는 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 기초연금, 4대 중증질환 지원, 무상보육, 반값 등록금, 18개월로 군 복무기간 단축, 임금피크제와 연계한 60세 정년 법제화 등 일부 핵심 공약들의 내용을 하향 조정하거나 시행 시기를 뒤로 미루었다. 여기에서 한발 더 나아가 현실성이 떨어지는 공약들의 수정과 폐기를 계속해나가다 보면 약속 위배라는 비판에 직면할 수도 있다. 하지만 현실 여건 상 그럴 수밖에 없다면 욕을 먹더라도 조정하는 게 대통령의 책임 있는 태도다. 다만 조정이 불가피하다면 어떤 식으로든 국민에게 소상하게 설명하고 충분한 이해를 구해야 할 것이다.
박근혜 정부의 내년 예산안(357조7000억 원)은 가뜩이나 과도한 복지공약 부담과 경기 부진으로 25조9000억 원 규모의 적자로 편성됐다. 공약가계부는 임기 5년 동안 134조8000억 원을 마련해 104개 국정과제를 이행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포퓰리즘이 심했던 작년 총선과 대선 때의 공약들 가운데 추리고 추린 것이 이 정도다. 올해 국가채무가 사상 처음으로 500조 원 대를 넘어선 판국에 공약 이행을 위해 빚을 키우는 것은 국가재정을 위태롭게 할 뿐이다. 지금은 경제를 살려 국가경제의 토대를 튼튼히 하는 것이 급선무다. 박 대통령이 공약 재조정을 주저할 이유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