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말 개봉해 일주일 만에 200만 관객을 동원한 용의자. 이 영화의 미덕은 속도와 리얼함이다. 137분이라는 짧지 않은 시간은 격투, 총격, 고공낙하, 자동차 추격신으로 꽉 짜여 있다. 스턴트맨 출신인 원신연 감독은 진짜 같다는 느낌을 줄 수 있도록 인물의 동작이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편집했다고 말했다.
그 덕분에 영화는 액션의 지평을 넓혔다는 평을 받는다. 정지욱 영화평론가는 기존 한국 액션영화가 미적인 스타일을 강조하는 데 치중했다면 용의자는 더 직설적으로 액션 본연의 속도감을 강조하는 게 특징이라면서 자동차 추격신을 포함해 잘 짜인 액션 장면이 할리우드 영화 못지않다고 호평했다. 용의자는 국내 개봉 전 미국 일본 홍콩을 비롯해 해외 7개 지역에 선판매됐다. 배급사인 쇼박스는 10일 미국에서 개봉하는데 스토리나 액션 장면에 대한 평가가 좋다고 전했다.
용의자는 액션의 스타일이나 소재 면에서 최근 한국 액션영화의 대세를 따르는 작품이다. 용의자에 등장하는 격술, 돋보이는 자동차 추격신, 북한 특수부대 출신 꽃미남이라는 소재는 요즘 한국형 액션영화의 특징이기도 하다.
제이슨 본의 한국인 후예들
주인공 지동철(공유)은 상대를 공격할 때 머리 부위를 비롯해 급소가 집중된 부분을 빠르게 연속적으로 공격한다. 동작은 화려하기보다 합리적이다. 북한 첩보원 출신인 지동철의 액션은 태권도를 기초로 한 북한의 주체격술에 러시아 특공무술인 시스테마를 섞은 것이다. 용의자의 오세영 무술감독은 시스테마는 옛 소련 시절 물리학자까지 가세해 최단 거리, 최대 타격점 같은 것을 고려해 만든 무술로 알려져 있다. 동작이 단순하면서도 강하다고 설명했다.
액션 자체만 본다면 용의자는 할리우드 첩보물인 본 시리즈를 떠올리게 한다. 본 아이덴티티(2002년)에서 시작해 본 슈프리머시(2004년) 본 얼티메이텀(2007년) 본 레거시(2012년)로 이어지는 본 시리즈의 액션은 빠른 스피드와 급소 공격 중심의 실전성을 강조한 게 특징이다.
제이슨 본의 후예는 용의자뿐만이 아니다. 최근 첩보를 소재로 한 대부분의 한국 영화에서는 본 시리즈와의 유사성을 찾을 수 있다. 시스테마 외에 크라브마가(이스라엘 특공무술), 칼리아르니스(필리핀 전통무술), 실랏(인도네시아 전통무술) 같은 낯선 무술이 영화에 응용되기 시작한 것도 본 시리즈의 등장과 무관하지 않다.
한국 영화에 본 스타일이 본격적으로 도입된 것은 600만 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한 아저씨(2010년)부터다. 아저씨의 액션 장면은 칼리아르니스와 실랏, 크라브마가 등을 근간으로 만들어졌다. 이들 무술 역시 제어보다는 살상이 목적이라는 게 특징이다. 특히 아저씨에 등장하는 원빈의 나이프 격투신은 실랏의 동작에서 비롯된 것으로 알려지면서 대중적으로 관심을 받았다. 아저씨의 박정률 무술감독은 맨손이나 칼날 같은 작은소품을 쓰는 격투에는 실랏을, 스틱을 활용한 장면에는 칼리아르니스를, 한 명이 여러 명을 상대해야 하는 대결에는 힘 분배가 유리한 크라브마가의 동작을 참고했다고 설명했다.
지난해 개봉한 한국 영화 중에는 이 같은 실전무술을 반영한 작품이 많다. 은밀하게 위대하게와 동창생은 칼리아르니스와 주체격술, 스파이는 시스테마를 참고한 것으로 알려졌다. 특정 실전무술을 반영하지 않았더라도 연속 단타 형식의 감정이 배제된 무술은 최근 첩보물 격투의 대세로 자리 잡았다. 전문식 무술감독은 과거에는 첩보 액션이라도 한 번 공격하고 한 번 방어하는 식으로 동작이 크고 호흡이 길었지만 최근에는 한 번 공격할 시간에 세 번 이상 연속 공격을 이어가는 게 유행이라고 전했다.
한국 액션영화의 진화
용의자의 여러 액션 가운데 특히 주목받는 것은 자동차 추격 장면이다. 특히 후진으로 좁은 골목길 계단을 내려오는 장면은 백미로 꼽힌다. 제작진은 이 장면을 위해 자동차 충돌사고 분석업체에 의뢰해 계단의 각도와 개수, 차종, 운전자 몸무게에 걸맞은 차의 무게와 속도를 산출했다. 원신연 감독은 과거 자동차 추격신은 안전 점검을 위해 미리 테스트 촬영을 하는 게 전부였다. 이번 영화에서는 좀 더 과학적인 데이터를 얻는 방식으로 진일보한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자동차 추격 장면은 제작비의 한계 등으로 한국 액션영화에서 가장 늦게 발전한 분야다. 황해와 도둑들의 유상섭 무술감독은 1990년대 들어 쉬리를 통해 시가 총격전이 본격화됐고, 자동차 추격전은 2000년대 들어서부터 제대로 시작됐다고 볼 수 있다면서 1000만 관객을 최대치로 보는 국내 영화계에서는 비용이 많이 드는 자동차 액션에 투자할 여력이 크지 않다고 전했다.
그러나 스턴트 기술이나 무술연출의 수준은 세계 수준에 뒤지지 않는다는 자평이 나온다. 지난해 할리우드 영화 지.아이.조2의 무술지도를 맡은 바 있는 정두홍 한국무술연기자협회장은 한때는 홍콩에 20년 뒤졌다는 평도 들었지만 이제 한국 스턴트나 무술연출은 할리우드에 못지않다면서 2000년대 이후 한국 영화 산업이 발전하면서 액션영화의 수준도 높아졌다고 설명했다.
인상적인 자동차 추격 장면으로 호평 받은 영화 나는 살인범이다의 정병길 감독도 아직 제작비의 한계는 있지만 다양한 각도를 촬영할 수 있는 카메라 기술의 진보 덕분에 같은 장면을 두고도 새로운 스타일의 영상을 만들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북한 출신 꽃미남 용병이 유행하는 이유
용의자는 지난해 먼저 개봉한 은밀하게 위대하게 동창생과 마찬가지로 북한 출신 인간병기라는 소재를 다루고 있다. 사실 이 세 영화의 뿌리는 강재규 감독의 쉬리(1999년)에 닿아 있다. 쉬리는 기존 반공 영화에나 쓰이던 남북 대립 상황을 액션영화에 접목해 성공한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쉬리의 흥행 이후 일제강점기의 첩보원과 건달 이야기(1960, 70년대)나 조폭코미디(1990년대) 중심이던 한국 액션에 남북분단과 간첩을 소재로 한 첩보물이 제작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북한이 적으로 등장했던 쉬리와 달리 2010년 이후 등장한 액션영화 중에는 의형제(2010년) 베를린(2012년) 은밀하게 위대하게 동창생 용의자처럼 북한 출신 첩보원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사례가 늘었다. 강유정 영화평론가는 과거 액션영화는 국가나 민족 같은 거대 담론을 다룬 데 비해 최근의 액션영화는 주인공이 지켜내야 할 대상이 개인이나 가족으로 바뀌고 있다고 설명했다.
김태훈 대중문화평론가는 간첩의 경우 익숙하지만 실체를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액션영화의 소재로 주목받는 것 같다면서 특히 최근의 북한 첩보원 출신 남자 주인공들은 뱀파이어처럼 능력이 뛰어나면서도 가족에게는 희생적인, 한국 남자에겐 기대하기 어려운 판타지적 존재라고 분석했다. 구가인 기자 comedy9@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