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이들의 염원에도 불구하고 비참한 결말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슬람국가(IS)에 붙잡힌 일본인 인질 두 명의 이야기다. 두 번째로 살해된 고토 겐지() 씨는 전화() 아래 고통받는 서민과 어린이들을 보도해 온 저널리스트다. 적어도 그만이라도 구하고자 I am Kenji(나는 겐지다)라는 목소리가 세계에서 일어났다.
사건이 표면화됐을 때 나는 11년 전 일을 떠올렸다. 2004년 4월 이라크에서 일본인 3명이 이슬람 전사집단이란 그룹에 붙잡혔다. 복면을 한 남성이 총을 겨누는 영상이 공개됐다. 요구 사항은 자위대를 철수시키라는 것. 일본인 3명은 이라크 부흥 지원을 위해 이라크 사마와에 파견 나간 자위대원들이었다.
일본 정부는 응하지 않았지만, 과연 아사히신문은 사설에서 어떻게 주장할 것인가, 논설주간이었던 내게 그 건은 난제였다. 아사히신문은 이라크전쟁에 대의()가 없다고 강하게 비판했고, 위험하다며 자위대 파견도 반대했기 때문이다. 논설위원실에서 열띤 토론 후 내린 결론은 협박으로 인해 철수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독자로부터 아사히신문이 배신했나라는 비판도 받았지만 그런 비열한 수단에 응하면 테러리스트가 바라던 대로 돼버린다. 인질 작전이 더 확대돼 타국에도 폐를 끼치기 쉽다. 정말 괴로운 결단이었다.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만약 인질이 살해됐으면 필시 씁쓸한 뒷맛을 느꼈을 것이다. 무거운 마음에 1주일 정도 잠을 설쳤지만 다행히 그들은 석방됐다. 뭐라 말할 수 없는 안도감을 맛본 기억을 잊을 수 없다.
하지만 이번 상대는 매우 질이 나빴다. 팔레스타인과 이슬람 국가로부터도 야쿠자들로 취급받는 비인도적 집단이다. 기독교를 부정하고 과거 서구 제국이 중동에 그었던 국경선을 부정하기 때문에 말이 통하지 않는다. 종교와 민족 대립에 더해 이슬람 사회의 혼란과 희망 없는 삶이 그들을 전투로 내몰았다. 증오의 역사는 중세로 거슬러 올라가, 그들과 싸우고 있는 연합군을 십자군에 비유해 일본도 십자군에 참가했다며 표적으로 삼았다.
자, 이에 비하면 지금 동아시아는 평화롭다. 아니, 북한은 핵과 미사일로 위협을 하고 있고 일본인 납치 문제도 해결되지 않았다. 일중도 한일도 실랑이를 벌이고 있다. 그런 반론이 나올 것 같지만 625전쟁 휴전 이후 60여 년간 이 지역에 전쟁이 없었던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일본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 70년간 한 번도 전쟁을 일으키지 않았다.
유럽에도 코소보 전란이 있었다. 현재 중동뿐 아니라 우크라이나와 러시아도 분쟁을 벌이고 있는 걸 보면 동아시아의 평화 유지는 의미 깊다. 거기엔 여러 요인이 있겠지만 무엇보다 격심한 종교 대립이 없었던 게 중요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런 평화를 상징하듯 오늘(12일)부터 일본 전국에서 1400명의 관광객이 잇달아 한국에 간다. 각지 여행업계가 한일 수교 50주년을 기념하는 한일우호교류투어를 기획한 것이다. 2박 3일 일정으로 여러 프로그램을 준비했다. 이를 주도하는 사람은 전국 여행업계 회장이기도 한 자민당의 니카이 도시히로() 총무회장이다.
중국 우호파로 유명한 니카이 총무회장은 한국과도 인연이 깊다. 지금부터 500여 년 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한국에 출병했을 때 화승총 정예부대를 이끌던 일본의 무장이 이 전쟁에 대의가 없다고 반기를 들고 나중에 한국에 귀화해 김충선이라는 장군이 됐다. 사야카()로 불린 그는 지금도 수수께끼로 남아 있지만 그의 본거지가 와카야마()였다는 설은 유력하다. 거긴 니카이 총무회장의 선거구다. 현지에는 김충선 장군의 기념비도 세워져 있다.
니카이 총무회장과 만났더니 이웃해 있는 한일 간 국민 교류가 가장 중요하다. 그렇게 생각하고 호소했더니 점점 숫자가 부풀었다며 웃었다. 아직도 정상회담 전망이 불투명한 양국 정부에 대한 무언의 비판으로 자신도 서울에 간다.
중동에선 상상도 못할 이야기 아닌가. 한일은 이런 평화를 소중히 여기고 동아시아 평화를 견인하지 않으면 안 된다. 양 정상은 어린이 같은 싸움을 계속할 게 아니라 한일을 보라, 동아시아를 보라고 세계에 어필할 만한 역사관과 도량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