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대선을 한 달 앞둔 지난해 10월 NBC의 인기 코미디 프로그램 ‘SNL’에는 도널드 트럼프 당시 공화당 대선 후보와 똑같은 모습의 인물이 등장했다. 특유의 삐죽거리는 모양의 입술과 상대방의 말을 끊어버리는 TV 토론 자세까지. 누가 봐도 트럼프 후보의 모습이었지만 실상은 할리우드 유명 배우 앨릭 볼드윈이 흉내 낸 것이었다.
재치 있는 풍자로 끝나는 듯싶었지만 방송 이후 오히려 논란이 커졌다. 트럼프가 당선인 신분이던 지난해 12월 자신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트위터에 “SNL은 완전히 편향되고 재미도 없다. 도저히 시청할 수 없는 수준”이라고 혹평을 가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국 사회는 오히려 풍자를 받아들이지 못한 트럼프 대통령을 비판했다. 당시 워싱턴포스트(WP)는 “SNL은 대통령을 희화화하는 전통이 있다. 하지만 SNL을 조롱한 대통령은 트럼프가 처음일 것”이라고 꼬집었다.
이처럼 미국에선 정치 풍자를 다룬 프로그램이 대중문화의 한 축으로 자리매김한 지 오래다. 1999년부터 방송된 존 스튜어트의 ‘데일리 쇼’. 미국의 주요 정치인을 스튜디오로 불러 조롱하는 방식으로 진행되는 이 프로그램의 주요 출연자는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과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 등 유명 정치인들이다. 불쾌함을 느낄 수도 있지만 미국 정치인들에게 출연하고 싶은 프로그램 1순위로 꼽힌다.
미국뿐 아니다. 민주주의가 성숙한 서구 사회에선 강력한 수준의 정치 풍자를 다룬 프로그램들이 즐비하다.
톨레랑스(관용)의 나라 프랑스에선 카날플뤼스 방송의 정치 풍자 프로그램인 ‘레 기뇰 드 랭포(뉴스 꼭두각시)’가 대표적이다. 정치인을 꼭두각시 인형으로 표현해 신랄한 풍자를 가하는 방식으로 프랑스 정계에선 악명 높은 프로그램이다.
그러나 2015년 7월 방송사가 프로그램의 종영을 알리자 자크 시라크 전 대통령부터 일반 시민들까지 프랑스 전역에 ‘종영 반대’ 여론이 들끓었다.
당시 프랑스 하원의장 클로드 바르톨론도 “표적이 된 정치인들은 기분이 나빴지만 프랑스 뉴스와 정치 논평을 빛냈다”며 ‘레 기뇰…’에 대한 지지를 보냈다. 결국 종영 계획은 취소되고, 현재까지도 프랑스 국민들의 사랑을 받는 풍자 프로그램으로 남아있다.
김은영 대중문화평론가는 “코미디 역시 넓게 보면 언론의 한 영역으로 표현의 자유가 무엇보다 중요한 곳”이라며 “정치와 언론 간에 독립성이 높은 국가일수록 풍자의 수준이 높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했다.
유원모 onemor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