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아침 신문 부고기사를 챙겨 보신다고 들었습니다.
“매일 부고기사를 읽는 것은 임종(臨終)의 롤모델을 찾고 싶어서입니다. 우리 부고를 보면 경제적 세속적인 성취에 대한 이야기가 대부분입니다. 죽기 전에 또는 죽음에 임박해 어떻게 삶을 마무리했는지 등에 관한 얘기를 만나고 싶은데, 그런 오비추어리를 찾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그럼 임종과 관련해 어떤 롤모델을 기대하고 계신건가요.
“얼마 전 누군가가 어느 60대의 장례식에 갔던 얘기를 해주더군요. 발인을 마치고 화장장으로 가는 길에 운구버스 안에서 세상을 떠난 고인의 영상을 틀어주었답니다. ‘이렇게 비도 오는 궂은 날, 저의 장례식을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저의 첫아이가 태어났을 때 너무 감동스러웠고…무사히 저의 생을 마치게 되어 다행스럽게 생각합니다.…조문 오신 여러분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대략 이런 내용이었다고 합니다. 비 오는 날까지 맞췄다는 건 날씨에 맞춰 영상을 여러 개 만들어 놓았다는 얘기겠지요. 놀랍고 감동적이지 않습니까. 이렇게 죽음을 앞두고 마무리를 잘 해놓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도 이래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는 죽음에 대한 성찰이 부족한 편인데 왜 그런 걸까요.
“아무래도 조선시대 유교사회를 거쳐 온 것이 큰 영향 아닌가 생각합니다. 유교는 내세관이 없잖아요. 그러니 현세에 집착하게 됩니다. 죽음을 놓고도 저승사자가 와서 우리를 끌고 가는 것으로 묘사하곤 했지요.”
―의사는 사람 살리는 직업인데 언제 어떻게 죽음에 관심을 갖게 되었나요.
“15년 전쯤 제가 쉰 살이 되기 직전이었습니다. 내가 죽으면 어떻게 되나, 갑자기 이런 불안감이 엄습하더군요. 그렇다고 교회나 절에 나가서 해결될 일은 아니었고 과학자인 의사로서 사후생(死後生)에 관심도 갖고 죽음 전반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죽음에 관심을 갖고 성찰하니 어떤 변화가 생기던가요.
“그때까지는 공부하고 논문 열심히 쓰고 그랬지요. 하지만 삶의 유한성, 죽음의 예측불가능성, 존재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후 나를 정리하는 습관이 생겼습니다. 강의자료도 정리하고 월급 명세서도 정리해 서울대병원 의학박물관에 기증도 하고, 물론 유언장도 준비했지요. 제 장례식에 어울리는 음악도 200곡 정도 준비했습니다. 음악은 앞으로 더 추려낼 생각입니다.”
인터뷰 도중 그는 “사실 레지던트 시절, 자살 충동에 빠지곤 했다. 그런데 죽음에 관심 갖고 공부하면서 완전히 극복했다”고 고백했다. 죽음에 대한 성찰이 마음에 위안을 주고 삶을 긍정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정 교수는 2007년 12월부터 죽음학을 강의하고 하고 있다. 한국죽음학회 이사로 참여하면서 죽음학회 강의뿐만 아니라 전국 곳곳을 돌며 대중과 죽음을 얘기해왔다. 대학의 최고위과정, 의학 관련 학회, 70대의 고교동창회 등 강의 대상도 다양하다. 최근엔 서울대 의대에 죽음학 강좌도 개설했다. 그의 죽음학 강의는 이번 달에 470회째를 맞는다.
―죽음학, 죽음 교육이라고 하면 뭘 가르치는 건가요.
“죽음을 멀리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우리 삶의 일부로 볼 수 있도록 함께 생각해보자는 것이 기본 취지입니다.”
―오해나 거부감은 없습니까.
“아직도 죽음학 하면 거부감을 갖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느 기관에서는 강의 제목에 ‘죽음’ 이란 단어가 있다고 해서 거부하더니 내용은 바꾸지 않고 죽음 대신 ‘아름다운 마무리’라고 이름을 바꿨더니 오케이하더군요. 한 번은 제주에서 강의할 때 엄마 손에 이끌려온 초등학교 3학년짜리도 있었습니다. 생각보다 열심히 강의를 듣더군요. 독일은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죽음을 공부합니다. 물론 반려동물의 죽음에 관한 것이긴 하지만요. 고등학교쯤 되면 윤리시간에 ‘시한부 선고를 받았을 때 어떻게 할 것인가’ 이런 것에 대해 토론도 한다고 하네요. 죽음을 공부하면 사회가 한층 성숙해지는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강의 때 근사(近死)체험 이야기도 많이 하신다고 들었습니다.
“근사체험은 일시적인 죽음 체험입니다. 순간적으로 심장박동이 멈췄다가 심폐소생술로 회생한 사람 가운데 10∼25%가 체험하게 되죠. 체외이탈 경험, 밝은 빛과의 교신, 이미 세상을 떠난 가족친지와의 만남 등이 근사체험의 주요 유형입니다.”
―신비로운데…영혼이 있다는 얘기인가요.
“근사체험 하면 영성술 같은 것으로 생각하는데 그게 아니라 과학적 실재입니다. 저는 과학자입니다. 제가 소개하는 근사체험은 Lancet(란셋)이나 미국신장병학회지 같은 의과학 전문학술지에 게재된 논문 내용입니다. 영혼의 존재 여부가 아니라 육신이 작동을 멈추더라도 우리의 의식은 또렷이 유지된다는 것을 체험을 통해 알 수 있는 겁니다. 신비체험이라면 그런 학술지에 실릴 수가 없겠지요.”
―다른 사람의 근사체험이 왜 우리에게 중요한 겁니까.
“타인의 근사체험은 죽음에 대한 우리의 공포를 없애줄 수 있습니다. 순간적인 죽음이었지만 죽음이 고통스럽지 않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특히 말기암 환자처럼 죽음이 임박한 사람들은 죽음의 공포를 크게 누그러뜨릴 수 있어요. 긍정적으로 변하게 되어 자살 예방에도 도움이 됩니다. 제가 15년 전 죽음의 공포를 이겨낸 것도 근사체험 현상을 공부한 덕분이었습니다.”
―요즘 우리는 거의 모두 병원에서 생을 마감합니다.
“우리는 가장 비참한 임종을 맞는 나라입니다. 중환자실에서 인공호흡기에 의지한 채, 가족들과 마지막 눈빛도 주고받지 못하고 고통스럽게 세상을 떠나지요. 품위 있는 죽음과는 아주 거리가 먼, 외롭고 비참한 죽음입니다. 수십 년 전만 해도 할아버지 할머니의 죽음을 손자 손녀가 집에서 모두 지켜봤는데….”
―그래도 중환자실은 더 붐빕니다.
“과학과 의학의 발달로 연명치료가 늘어났습니다. 환자나 가족 의료진 모두 생명을 연장시키지 않으면 의료행위의 실패로 보려고 합니다. 그런데 과연 말기암 임종자까지 연명치료를 적용해야 할 것인지 의문입니다.”
―최근 시행된 ‘연명의료결정법’에 동의하시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무의미한 연명 치료는 환자의 고통만 가중시키고 가족들에게 더 큰 아픔만 남기게 되지요. 연명의료결정법은 일본도 입법을 못했는데 우리는 했습니다. 연명치료에 집착하는 관행을 고쳐나가야 합니다.”
―자신이 말기암인지도 모르고 중환자실에 입원한 사람도 있습니다.
“말기암 환자 당사자에게 그 사실을 알려주지 않는 가족들이 있습니다. 그건 좋지 않습니다. 환자에게 병을 설명하고 이해를 구하면, 환자가 적극적인 치료를 받아 더 효과가 좋을 수 있고 남은 생을 더 열심히 살려고 합니다. 그러다가 편안하게 죽음을 맞는 것이 존엄하게 죽는 것입니다.”
―환자는 자신의 죽음을 준비해야 할 권리가 있다는 말씀이군요.
“며칠 여행을 다녀올 때도 가족들에게 ‘문단 속 잘하고 밥 잘 챙겨먹고’ 이런 얘기를 하는데 죽음의 여행을 떠나는 마당에 아무런 얘기도 못하고 눈을 감아야 한다니요.”
―고령화시대가 되면서 생존에 대한 기대가 더 커졌는데요.
“사실 요즘 우리 사회 곳곳에서 ‘100세 환상’을 부추기는 것 같습니다. 100세 시대를 참 쉽게 얘기하는데 솔직히 100세까지 산다는 건 보통 일이 아닙니다. 여든이든 아흔이든 나름대로 훌륭한 삶을 살았다면 이제는 삶의 길이를 연장하려는 것보다는 삶을 잘 마무리하려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주변 사람들의 장례식장에 가시면 어떤 생각이 듭니까.
“우리의 병원 장례식장에 가면 망자(亡者)는 없습니다. 시신도 그곳이 있는 것이 아니라 좀 떨어진 곳 냉동칸에 있지요. 떠나간 사람이 좋아했던 음악이나 영상 등을 조문객들이 공유하면 좋을 텐데 그게 참 어렵습니다.”
―죽음학자이자 의사로서 죽음은 뭐라고 정의하십니까.
“죽음은 겨울옷을 입다가 봄옷으로 갈아입는 것과 같다고 할까요. 죽음은 소멸이 아니라 옮겨감입니다.”
―그럼 죽음을 어떻게 준비해야 하나요.
“평소에 가족과 죽음에 대해 많이 이야기해야 합니다. 가족마다 상황이 다르겠지만 그때 그때 지난 시간을 돌아보며 유언장도 써보고 내가 좋아했던 음악이나 그림도 찾아놓고 말이지요. 그렇게 되면 가족 구성원에 대한 이해도 더 커질 겁니다.”
정 교수가 근무하는 서울대병원은 하루 종일 분주하다. 인터뷰를 마치고 암병동을 지나려니 그곳을 오가는 사람들이 지치고 힘들어 보였다. 그때 정 교수의 말이 생각났다. “의사가 이런 말하면 욕먹겠지만 병원 입구에 ‘인간은 늙고 죽는다’는 문구를 적어 크게 붙여 놓고 싶습니다.” 죽음을 좀 더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였다.
이광표 kpl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