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인들 삶의 여러 풍경을 보여줄 수 있는 신간이 잇따라 출간됐다. ‘조선의 잡지’는 유득공(1748∼1807)이 쓴 풍속지 ‘경도잡지(京都雜志)’의 ‘풍속’ 편을 뼈대로 18∼19세기 서울 양반의 의식주, 취미, 놀이, 의례 등 생활상을 들여다본 책이다.
책에 담긴 양반들의 ‘취향’은 놀라운 수준이다. 비둘기를 오늘날의 마니아처럼 극진히 사랑한 양반들도 있었다. 재력이 있는 서울 양반들은 8칸짜리 비둘기 집인 용대장(龍隊藏)을 호화롭게 장식하고 칸마다 다른 종류의 진귀한 비둘기를 키웠다. 누가 더 비싼 비둘기를 많이 사들이냐를 놓고 경쟁하기도 했다. ‘경도잡지’는 8가지 비둘기 종류를 소개하고 있다.
양반들의 매화나 국화 사랑도 정평이 나 있다. 18세기 화훼 재배가 성행했고, 관련 서적도 쏟아져 나왔다. 화초를 잘 기른다는 말을 들으려면 소철(蘇鐵) 정도는 능숙하게 관리할 줄 알아야 했다. 소철은 주로 중국 동남부, 일본 남부 등 더운 곳에서 자라는 나무로 당시에는 우리나라에서 키우기 쉽지 않았다. 양반들은 온실을 만들어서 이런 식물을 키웠다.
패물인 손칼(粧刀·장도)은 남성들도 차고 다녔다. 칼자루와 칼집을 만드는 데는 은, 옥, 코뿔소의 뿔, 바다거북의 등딱지, 나무, 검은 물소 뿔 등이 쓰였다. 구하기 어렵거나 국내에서 생산되지 않는 재료들이 대부분이다. 한국전통문화대 교수인 저자는 문방구, 지붕 장식 등 양반들의 고급스러운 취향뿐 아니라 꽃놀이, 과거 급제 축하 행사, 신입 관리의 ‘군기’를 잡는 면신례(免新禮) 습속 등을 세세하게 담았다.
‘조선 무인의 역사…’는 조선에서 문과(文科)에 비해 덜 조명된 무과(武科)에 대한 연구를 풀어쓴 책이다. 한국사를 연구한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교수가 2007년 미국에서 출간했다.
책에 따르면 무과는 평민들의 신분 상승을 위한 수단으로 활용된 면이 강하다. 16세기부터는 서얼과 천민 출신도 곡물로 값을 치르면 과거에 응시할 수 있었다. 1676년 무과에서 선발된 1만7000여 명의 합격자 가운데 양반 출신은 한 명도 없었다.
무과 급제자 수도 엄청났다. 1402∼1591년 동안 무과 급제자는 7758명이었지만 임진왜란 이후 15년(1592∼1607년) 동안 약 2만∼4만 명이 무과에 합격했다. 이후 무과가 폐지되는 1894년까지 급제자는 12만1623명이나 됐다. 이들이 모두 무관으로 임용된 건 아니다. 저자는 “조선은 피지배층에 잠재된 체제 전복적 요소가 봉기로 이어지는 것을 막아주는 장치로 무과를 활용했다”고 말한다.
‘법과 풍속으로 본 조선 여성의 삶’은 여성사에 착목한 충남대 명예교수의 책이다. 혼인, 이혼, 간통 등의 역사가 담겼다.
효종3년(1652년) 정호라는 이가 누이를 살해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종과 간통했다는 게 이유였다. 효종은 “자기에게 누가 미칠 것을 면하려고만 했을 뿐 털끝만큼도 피붙이를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며 정호를 극형에 처하도록 했다. 저자는 “이때까지만 해도 국가의 대처는 여성의 정절 상실보다 정호의 패륜에 강한 분노를 보였다”며 “그러나 후대로 갈수록 체제의 위기에 봉착한 지배계급이 위신을 세우기 위한 방편으로 여성에 대한 성적 규제를 강화했다”고 말했다.
조종엽 jjj@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