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 24일 해체 작업을 진행 중인 것으로 알려진 서해위성발사대는 인공위성과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관련 기술의 실험, 발사가 이뤄져온 북한의 주요 미사일 시설 중 하나다. 6·12 싱가포르 정상회담에서 이 시설의 해체를 약속해놓고도 뜸을 들이던 북한이 뒤늦게 이행에 나선 것은 미국에 ‘대화를 지속하겠다’는 메시지를 던지면서 동시에 상응하는 조치를 압박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구체적인 체제 보장 카드를 제시하라는 거다.
○ 조용히 공개한 北의 협상 카드
20일 평안북도 철산군 동창리 서해위성발사장 사진에는 발사체의 발사에 앞서 조립이 이뤄지는 레일식(rail-mounted) 구조물 일부가 해체돼 있는 장면이 포착됐다. 평소에는 가려져 있던 지하 환승 시설도 모습을 드러냈다.
이틀 후인 22일 위성사진에서는 건물 한쪽 모서리 부분이 완전히 철거되고, 해체된 구조물이 바닥에 놓여 있는 등 작업이 더 진행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엔진실험장을 덮고 있던 가림막도 치워졌다. 다만 연료 및 산화제 벙커와 주 처리 건물, 발사탑은 해체가 진행되지 않은 상태라고 38노스는 전했다. 보고서를 작성한 조지프 버뮤데즈 연구원은 “해체 작업은 약 2주 전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한미 정보당국도 발사장의 67m 높이 발사대에 세워진 타워 크레인이 부분적으로 해체된 정황을 포착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보당국은 위성사진 판독 등을 통해 정밀 추적, 분석 작업을 진행 중이다.
서해위성발사장은 2016년 2월 ‘광명성 4호’가 발사된 곳으로, 2012년 이후 북의 주요 발사체 실험 및 발사 시설로 이용돼 왔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에게 폐기를 약속했던 미사일 엔진 실험장으로 지목돼온 곳이기도 하다.
당초 미사일 엔진 실험장의 폐기는 북-미 대화가 교착 국면에 놓인 상태에서 북한이 또 하나의 협상 카드로 쓸 것이라는 관측이 많았다. 그러나 북한은 5월 외신기자를 초청해 공개적으로 진행했던 풍계리 핵실험장 폐기 때와 달리 이번에는 조용히 해체 작업에 들어갔다. 남성욱 고려대 행정대학원장은 “북한이 핵시설의 신고와 검증 같은 본질적인 비핵화 조치를 요구받고 있는 상황에서 발사장 해체 같은 이벤트는 협상 카드로 쓰기에는 약하다”며 “북한이 미국에 향후 협상의 ‘미끼’로 쓰면서 자신들의 내부 로드맵에 따라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시도”라고 설명했다.
○ 북-미 대화 동력 되살아날까
청와대는 북한이 동창리 ICBM 엔진 실험장 해체 움직임을 보인 것에 대해 “비핵화에 좋은 영향을 미칠 것”이라며 기대감을 감추지 않았다. 남관표 국가안보실 2차장은 “비핵화를 위해 차곡차곡 가고 있는 것으로 본다”며 “북한이 (발사장 해체를) 이벤트로 만들지 않고 진행하는 것은 북한 나름대로 시기를 조절하기 위한 것인지 그 의도를 분석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미국에 체제 안전보장 조치를 요구하며 비핵화 조치 이행을 늦추던 북한이 엔진실험장 폐쇄에 나선 것이 미국과의 대화 모멘텀을 살리기 위한 전략일 수 있다는 것이다.
북한의 이런 움직임은 시기적으로 정전협정 체결 65주년이 되는 27일로 예상되는 미군 전사자의 유해 송환과도 맞물려 있다. 일각에선 트럼프 대통령이 11월 중간선거를 앞둔 만큼 북한이 종전선언 등 가시적 성과를 얻어내기 위한 베팅에 나선 것 아니냐는 해석도 나온다.
최근 미국을 방문한 정의용 청와대 국가안보실장도 북한의 엔진실험장 해체 움직임을 사전에 파악하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따라 정 실장과 존 볼턴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의 회동에서는 북한의 엔진실험장 폐기에 대한 평가와 함께 북한이 요구하고 있는 종전선언 등 비핵화 조치에 상응하는 보상 방안을 앞당기는 방안이 집중 논의된 것으로 보인다.
이정은 lightee@donga.com · 문병기 weappo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