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 김수민 씨(25)는 최근 피포페인팅에 푹 빠졌다. 피포페인팅은 유화물감을 이용해 명화나 캐릭터를 따라 그릴 수 있도록 만든 컬러링북이다. 그는 “퇴근한 뒤에 또는 출근하지 않는 주말에 책을 펼쳐놓고 피포페이팅에 열중한다”고 했다. 조르주 쇠라의 ‘그랑드자트섬의 일요일 오후’를 본뜬 그림과 함께 김 씨가 보여준 물감 색은 15가지가 훌쩍 넘는다. 빨강, 분홍, 노랑, 연두, 초록, 주황…. 그는 “채도가 낮고 비슷한 색깔 위주인 것보다는 이렇게 다양한 색상을 활용해 그릴 수 있는 책을 선호한다”고 밝혔다.
색깔의 시대다. 교보문고 베스트셀러 예술 분야 10위권 내에서 컬러링북이 4, 5권을 차지할 만큼 컬러링북의 인기가 식지 않는 데다 색연필과 크레파스, 수채화물감, 유화물감 등 색칠의 재료도 확대됐다. 여기에다 색칠을 하는 대신 스티커를 붙이는 컬러링북까지 나왔다. 모두 만들어진 밑그림에 지정된 색깔을 칠하는 형식이다. 스마트폰이나 태블릿PC의 컬러링 애플리케이션(앱)도 인기가 높다. 밑그림을 펼쳐놓고 색칠하는 장면을 보여주는 유튜버들도 있다.
이런 컬러링 콘텐츠들은 대부분 다채로운 색상으로 이뤄졌다. 최근 프랑스의 설치미술가 다니엘 뷔렌이 원색의 필름들을 붙여 작업한 동아미디어센터도 주목받고 있다. 머리가 복잡할 때면 스마트폰 앱의 컬러링북을 열게 된다는 직장인 이상희 씨(24)는 “색깔을 다양하게 쓸 때 즐거움을 느낀다. 그림 하나에 적어도 7, 8가지 색깔을 쓰게 되는데, 좀 유치해 보일 수도 있지만 어차피 나만 보는 그림이니 크게 마음 쓰지 않는다”면서 “일상에서는 마음대로 안 되는 일이 많은데 색깔만이라도 마음 가는 대로 쓰고 싶다”고 덧붙였다.
다양한 색을 사용할 수 있다는 점이 이렇게 소비자들을 끄는 이유가 뭘까. 김선현 차의과학대 미술치료학과 교수는 “여러 매체를 통한 컬러링은 분주한 사회에서 스트레스를 푸는 도구로도 쓰이지만, 색깔에 대한 대리만족으로도 해석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사람들은 대부분 일상에서 한정적인 색깔을 많이 쓰게 되며 색깔에 변화를 줄 수 있는 구두나 가방 등도 튈까 싶어 과감한 색상으로 선택하기가 쉽지 않기에, 현실에서 쓰기 어려운 다양한 색깔을 컬러링북이나 앱을 통해 써본다는 것이다.
김 교수는 또 “사람들은 무의식중에 색에 반응하고 그 영향을 받는다. 피곤하고 짜증스럽다가도 푸른 하늘이나 화사한 꽃을 보면 기분이 좋아진다”면서 “색이 감정과 기분에 영향을 미친다는 의미”라고 밝혔다. 피포페인팅을 즐기는 김수민 씨는 실제로 “밝고 환한 색을 쓸 때 생활에 더욱 적극적인 마음이 생긴다”고 말했다.
최근 전시회에서 다양한 색상에 시를 더한 작품을 선보인 화가 안성민 작가는 “각기 다른 색은 사람에게 서로 다른 감정을 전해준다”고 말한다. 사람들이 다양한 색깔을 사용할 수 있는 컬러링에 열광하는 것은 색상이 인간의 다양한 감정을 보여주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경기 불황을 겪고 있고 형식적이고 의례적인 인간관계가 고착화하면서 감정 표출에 억눌린 사람들이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화려한 색상에 몰입한다는 얘기다. 안 작가는 “이런 다채로운 색깔들은 단순히 예쁘다기보다는 감정을 끌어내고 전달하는 적극적 기능이 있다”고 설명했다.
김지영 kimj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