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을 결정하는 건 권력자들이지만 전쟁의 최대 피해자는 민중이다. ‘냉전시대 최초의 열전’이었던 6·25전쟁은 한민족 역사의 최대 비극을 낳았다. 그 충격은 한국을 한 번도 와 본 적 없는 이국의 화가들에게도 미쳤다.
1951년 프랑스 파리에서 활동하던 파블로 피카소는 ‘한국에서의 학살’을 그려 전쟁의 참상을 세계에 고발했다. 같은 해, 폴란드 화가 보이치에흐 판고르 역시 6·25의 비극을 알리기 위해 ‘한국 엄마’를 그렸다. 화면 속 엄마는 피를 흘리며 길바닥에 쓰러져 있고, 어린 아들은 엄마 시신을 붙잡고 화면 밖 관객을 응시하고 있다. 망연자실한 표정의 아이는 ‘도와주세요’라고 말할 기운조차 없어 보인다. 멀리 배경에는 폭격으로 불탄 마을 위로 시커먼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다. 그림 속 아이는 전쟁고아로 살아남았을지, 피란길에 엄마처럼 죽었을지 알 수 없다.
화가는 이 비극의 가해자를 직접적으로 드러내진 않았지만, 관객은 미군의 폭격으로 아이엄마와 마을이 희생되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당시 구소련의 영향 아래 있던 공산국가 폴란드에서 그려진 그림이기 때문이다. 그림의 기법 역시 소련에서 들어온 ‘사회주의 사실주의’ 양식을 따르고 있다. 사회주의적 관점에서 사회 현실을 그리는 이 창작 방법이 1949년 폴란드의 공식적인 예술 양식이 되자, 원래 입체파나 인상주의풍의 그림을 그렸던 판고르도 작품 스타일을 바꿔야 했다. 6·25전쟁은 그가 양식을 바꾼 후 처음으로 선택한 주제였고, 정치적 메시지를 담은 첫 작품이었다.
그림이 바르샤바에서 처음 전시되었을 때, 폭격의 주체를 구체적으로 드러내지 않았다는 이유로 비판을 받았지만, 훗날 이 그림은 좌우 이념을 넘어선 반전과 평화의 상징이 됐다. 엄마를 눈앞에서 잃은 전쟁고아의 처연한 눈빛은 그 어떤 반전 메시지보다 강렬하다. 전쟁은 결국 힘없고 무고한 사람들의 비극과 희생으로 귀결된다는 걸 각인시켜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