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이 대북제재 문제 등을 이유로 내세우며 한국에 전략물자 수출을 제한하자 “국가 안보를 남용해 세계 무역 체계를 위험에 빠뜨렸다”는 해외 전문가 및 주요 언론의 비판이 잇따르고 있다. 개념 자체가 모호한 국가 안보를 앞세워 무역 규제를 ‘무기화’하면 국제 무역 질서가 흔들릴 수 있다는 우려에서다.
뉴욕타임스(NYT)는 15일(현지 시간) 일본의 조치를 언급하며 “전 세계가 오랫동안 무역 분쟁이 통제 불가능한 선을 넘지 않도록 구축해온 질서를 약화시키고 있다. 무역전쟁으로 인한 피해가 점점 더 일반화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미국 외교전문지 포린폴리시(FP)도 “한일 분쟁은 국가 안보를 노골적으로 남용해 무역을 제한하는 조치로 세계 무역 체계가 직면한 위험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무역 장벽을 낮추기 위해 수십 년간 이어진 노력 및 성과가 무위로 돌아간다”고 우려했다.
한일 관계를 연구해온 대니얼 스나이더 미 스탠퍼드대 교수는 NYT에 “일본이 수출 제한을 안보 행보로 규정해 (세계 무역 질서의) 물을 흐렸다”고 우려했다. 브라이언 머큐리오 홍콩 중국대 박사도 “이런 조치가 너무 자주 쓰이면 국제 무역 체계가 통째로 무너질 위험이 있다. 1, 2개 국가가 아닌 10∼15개 국가들이 잘못 규정된 국가 안보 예외 조항에 근거해 이런 조치를 취하면 기존 규범이 훼손된다”고 지적했다.
일본의 이번 조치가 미국의 관세 정책을 따라하고 있다는 비판도 잇따랐다. 도널드 트럼프 미 행정부는 지난해 국가 안보를 이유로 해외에서 수입하는 철강과 알루미늄에 관세를 부과했다. 특정 물품의 수입 증가로 국가 안보와 관련된 산업이 피해를 볼 경우 정부가 규제 조치를 취할 수 있도록 하는 무역확장법 232조를 적용했다. 현재 자동차에 대한 관세 부과 여부도 같은 규정에 근거해 검토 중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달 초 멕시코 국경의 불법 이민자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멕시코가 협조하지 않으면 관세를 부과하겠다. 6월에는 5%로 시작해 매달 5%포인트씩 추가로 관세를 올리겠다”고 으름장을 놓기도 했다. 특히 멕시코에 이란 같은 적성국과의 교역을 제한하기 위해 만든 국제긴급경제권한법(IEEPA)을 이례적으로 적용하려 했다. 멕시코가 불법 이민자 차단에 적극 협조하기로 하면서 이 계획은 철회됐지만 국내외 비판이 거셌다. 미 국내 문제인 이민을 해결하기 위해 해외 통상 분야의 경제 보복을 언급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는 지적이 많았다.
다른 곳에서도 비슷한 사례가 나온다. 지난해 사우디아라비아, 바레인, 아랍에미리트(UAE) 등 수니파 중동국은 ‘시아파 맹주’ 이란과 밀착하고 있는 카타르와 단교해 카타르산 천연가스의 수출을 봉쇄했다. 중국도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도입을 이유로 한국에 경제 보복을 했다. 중국은 2010년 일본, 2012년 필리핀과 남중국해 영토 분쟁을 벌일 때 일본에는 중국산 희토류 수출 제한, 필리핀에는 필리핀산 바나나 수입 중단 등으로 압박했다.
워싱턴=이정은특파원 light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