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반 39분 페널티박스 왼쪽 지역에서 드리블을 시작한 ‘황소’ 황희찬(23·잘츠부르크)의 옆으로 다부진 체격(193cm, 92kg)의 사내가 달려왔다. 세계 최고 수비수로 불리는 리버풀의 피르힐 판데이크(28·사진)였다. 직선 돌파가 장기인 황희찬을 막기 위해 판데이크는 황희찬의 앞쪽으로 태클을 시도했다. 하지만 최근 ‘영리한 황소’로 거듭난 황희찬이 ‘수 싸움’에서 이겼다. 전진하는 볼을 왼발로 절묘하게 돌려놓아 방향을 바꿔 태클을 피한 것. 판데이크를 따돌린 황희찬은 강력한 오른발 슈팅으로 골망을 흔들었다.
잘츠부르크(오스트리아)가 0-3으로 지고 있던 상황에서 나온 황희찬의 통렬한 추격골에 지난 시즌 유럽축구연맹 챔피언스리그(UCL) 우승팀인 리버풀(영국)의 안방 안필드를 찾은 리버풀 홈팬들은 정적에 휩싸였다. UCL 안방 5경기 연속 무실점 행진 중이던 리버풀의 ‘철옹성’이 무너졌기 때문이다. 유럽축구연맹(UEFA)은 “황희찬이 UEFA 올해의 선수상을 수상한 판데이크를 완벽히 속였다. 안필드에서 시선을 사로잡은 선수는 황희찬이었다”고 극찬했다.
황희찬은 3일 리버풀과의 UCL E조 조별리그 2차전에서 1골 1도움을 기록하며 맹활약했다. 황희찬은 후반 11분에는 날카로운 크로스로 미나미노 다쿠미(일본)의 골에 도움도 기록했다. 지난달 18일 헹크(벨기에)와의 E조 1차전에서 1골 2도움을 기록했던 황희찬은 UCL 조별리그 2경기 연속 골을 기록했다. 팀별 2경기씩 치른 가운데 황희찬은 2골, 3도움으로 공격포인트 1위(5개)에 올라 있다.
잘츠부르크는 먼저 3골을 내주고도 황희찬 등의 활약에 힘입어 경기를 원점(3-3)으로 만드는 저력을 보여줬다. 하지만 후반 24분 리버풀의 에이스 무함마드 살라흐에게 결승골을 내줘 3-4로 졌다. 잘츠부르크와 리버풀은 나란히 1승 1패를 기록했다.
이날 비록 패하긴 했어도 추격의 출발점 역할을 한 황희찬은 유럽 언론의 주목을 한 몸에 받았다. 영국 매체 ‘스포츠바이블’은 “판데이크는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에서 55경기 연속 드리블 돌파를 허용하지 않았지만 황희찬을 막지 못했다. 황희찬이 판데이크에게 두통을 안겼다”고 전했다. 축구 통계사이트 ‘후스코어드닷컴’은 황희찬에게 팀 내 최고 평점인 8.2를 줬다.
최근 눈 부상을 당해 경기 초반 고글을 끼고 경기에 나섰던 황희찬은 경기 도중 시야에 방해가 되자 고글을 벗어 던지고 경기를 뛰는 투지를 보여줬다. 경기 후 인스타그램에 개천절을 맞아 태극기를 든 사진을 올린 그는 “결과는 좋지 않았지만 팀이 좋은 모습을 보여줬다. 늦은 시간에도 많은 응원을 해주신 팬들에게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별들의 전쟁’ UCL에서 맹활약 중인 황희찬은 AC밀란(이탈리아) 등 유럽 빅클럽 스카우트의 관찰 대상에 올라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세밀함이 떨어진다는 약점을 보완하며 경쟁력을 끌어올렸다. 황희찬 측 관계자는 “황희찬은 비시즌마다 한국에서 개인 트레이너와 함께 파워를 키우기 위한 몸 만들기에 열중한다. 드리블 등 개인기 장착과 킥 능력 향상을 위해 축구 아카데미를 찾기도 했다”고 말했다.
시즌 6골 10도움을 기록 중인 황희찬은 잘츠부르크에서 엘링 홀란드와 최전방 투톱으로 나섰을 때 가장 큰 파괴력을 보여주고 있다. UEFA는 “황희찬이 이번 시즌에 기록한 10개의 도움 중 6개가 홀란드를 위한 것이었다”고 전했다. 한국 축구국가대표팀에서 주로 측면 공격수나 윙백으로 나섰던 황희찬이 보직 변경과 함께 손흥민-황의조로 구성된 대표팀 투톱 경쟁에 뛰어들지에 관심이 쏠린다. 황희찬은 스리랑카(10일), 북한(15일)과의 2022 카타르 월드컵 아시아 2차 예선에 나설 한국 축구대표팀에 7일 합류한다.
정윤철 trigger@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