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 때부터 압록강, 두만강 지역에서 여진족과의 충돌이 잦아졌다. 여진족은 국경을 넘어 방어가 약한 마을을 습격하고 도주했다. 여진족의 습격을 막으려면 습격 부대를 추격해서 결정적인 타격을 입히는 것이 최선이었다. 그러나 여진족도 이를 예상하고, 조선의 지원 부대가 등장할 때쯤이면 미리 도주했다. 추격을 하려고 해도 세 가지 장애가 있었다.
첫째는 여진족의 매복이다. 매복에 걸려 희생자가 생기면 지휘관은 처벌을 면할 수가 없었다. 매복에 당하지 않으려면 신중하게 추격해야 하는데, 그러다 보면 속도가 느려지고, 도망치는 여진족을 따라 잡을 수 없다. 두 번째는 어둠이다. 매복과 연결되는 이야기지만 어둠이 깔리면 추격은 불가능했다. 여진족도 이를 알고, 시간을 계산하고 침공하기 때문에 조선군이 도착하거나 추격 부대가 다다를 때쯤이면 날이 어두워지기 일쑤였다. 셋째는 국경이다. 제대로 된 타격을 주려면 국경 너머까지 추격해야 했다. 당시 여진족의 영토는 명의 행정구역이었다. 그러다 보니 조선군은 압록강이나 두만강에 다다르면 추격을 포기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세종도 이 때문에 고민을 했다. 세종은 먼저 외교 노력을 해서 중국으로부터 여진족을 추격하기 위해 조선군이 국경을 넘는 정도의 행위는 개의치 않겠다는 약속을 명으로부터 받아냈다. 그럼에도 세종은 월경 추격을 대단히 조심했다. 위험 부담도 컸지만, 잦은 월경은 결국 중국의 의심을 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중의 눈치를 너무 보는 것이 아니냐, 사대주의 아니냐는 비판도 있을 것 같다. 그것이 끝이었다면 그런 비판도 정당하다.
하지만 세종이 훌륭한 이유는 양보하고, 손해를 보는 듯한 행동을 하더라도 그 뒤에는 큰 그림이 있고, 그 구상을 결코 포기하지 않고 추구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명에 신뢰를 얻은 덕에 세종은 2차에 걸친 야인정벌을 시도할 수 있었고, 4군 6진을 개척하는 업적을 이룰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