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고등학생들도 읽을 수 있는 쉬운 책을 써보자고 생각했어요.”
김영란 전 대법관(65)은 10일 전화통화에서 이 책을 쓴 이유를 묻자 이같이 답했다. 이 책은 출판사가 2014년부터 펴내고 있는 청소년 교양시리즈. 지난해 7월 출간된 동명의 성인 대상 대중서적에 삽화를 싣고, 문장을 쉽게 바꿔 청소년도 읽기 쉽게 만들었다. 영국 대헌장, 프랑스 인권선언, 미국 독립선언서, 독일 바이마르 헌법, 대한민국 헌법 등 인간의 권리를 보장하기 위한 투쟁의 역사가 녹아 있지만 읽기에 전혀 부담스럽지 않다.
그는 ‘판사의 꽃’으로 불리는 대법관 출신이다. 지금은 아주대 법학전문대학원 석좌교수다. 최고 수준의 법률 전문가라는 뜻이다. 그런데 그는 2019년엔 한국 대법원의 판결을 쉽게 풀어 쓴 대중 비평서 ‘판결과 정의’(창비)를 냈다. 대중 서적을 활발히 펴내다 청소년 도서까지 내고 있는 것이다.
왜 법률 전문서적이 아닌 청소년 도서를 썼을까. 그는 “법률 전문가들이 판결에 대한 해설과 이론서를 많이 쓰지만 보통 사람들이 읽기에는 어렵다”고 했다. 또 “청소년이 읽을 수 있으면 일반인도 편하게 읽을 수 있다는 뜻”이라고 했다. 전문가의 영역으로 어렵게 취급되는 법에 대해 눈높이를 낮춰 소개하면서 대중에게 다가가고 있는 것이다.
최근 한 출판사 편집자에게 들은 푸념이 떠올랐다. tvN 예능 프로그램 ‘유 퀴즈 온 더 블록’에 소개된 책들이 연달아 베스트셀러가 되고 있는 현상을 보며 이 편집자는 “출판사들이 대중에게 눈높이를 맞춰야 한다”고 했다. 방송인 유재석은 책을 써낸 각 분야의 전문가들을 만나지만 굳이 어려운 질문과 답변을 주고받지 않는다. 그럼에도 시청자들은 전문가들의 생각을 이해한다. 호기심이 커진 독자들이 책을 사보기도 한다. 유재석의 눈높이 덕분에 새 독자들이 유입되고 있는 것이다.
정보를 얻기 위해 쉽게 인터넷 검색을 하는 세상이지만, 여전히 책은 지식을 얻는 가장 좋은 길이다. 인터넷에 부정확한 정보가 많이 떠도는 것과 달리 대부분의 책엔 정확한 정보가 담겨 있다. 신뢰할 수 있는 저자를 섭외하고, 저자의 초고를 확인하고 고치는 출판사들의 노력 덕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는 돈을 주고 책을 산다. 그러나 책이 꼭 어렵게 쓰여야 할 필요는 없다. 책에 대한 높은 장벽은 독자를 서점에서 떠나게 할 뿐이다.
각 분야의 전문가 중에는 김 전 대법관처럼 생각하는 이들이 존재하고 있다. 출판사 편집자들이 청소년 도서나 대중 서적을 쓸 전문가를 더 많이 찾아냈으면 좋겠다. 김 전 대법관 역시 “청소년 도서를 쓰기로 한 건 출판사가 먼저 제안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책이 엘리트만의 전유물이 되지 않아야 책 읽는 시대가 다시 온다.
이호재기자 hoh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