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는 서울 성북구 동선동에 가면 들르는 곳이 있다. 연면적 37.75m²의 넓지 않은 곳. 서있으면 묘한 적적함이 도는 곳. 한국 근대 조각가인 권진규(1922∼1973)의 아틀리에다. 그는 1959년부터 숨지기 전까지 14년간 이곳에서 생활하며 ‘자소상’(1967년) 등을 만들었다. 그는 보는 이들을 강렬하게 사로잡는 데다 여러 감정을 생생하게 느끼게 만드는 작품들을 선보여 ‘천재 조각가’로 불린다.
그에 대해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기발함, 번득임, 날렵함, 귀기서림 등을 느끼게 하는 사람들이 있다. (중략) 둔해서인가, 나는 권진규에게서 그런 것들을 크게 느끼지 못했다. 대신 묵직함을 느꼈다”고.
저자는 권진규의 누이 권경숙의 둘째 아들로, 2008년 권진규기념사업회를 설립해 작품의 수집·연구를 이어왔다.
저자는 그저 한 인간으로서 권진규를 말한다. 권진규의 전 아내 오기노 도모와의 이야기는 특히나 애잔하다. 1949년 일본 무사시노미술학교 조각과에 입학한 권진규는 도모와 8년 연애하다 결혼한다. 한일 국교 정상화 이전인 1959년, 권진규는 국내에서의 성공을 꿈꾸며 혼자 귀국했고 5년 뒤 장인이 보낸 이혼서류에 서명한다. 두 사람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다시 만난 건 1968년 도쿄에서 열린 개인전에서였다. 저자는 ‘도모’(1957년), ‘재회’(1967년) 등의 작품을 통해 권진규의 마음을 유추한다.
추상 조각이 유행했지만 권진규는 구상 조각을 고집했다. ‘지원의 얼굴’(1967년)과 ‘십자가 위 그리스도’(1970년)로 대표되는 테라코타(흙으로 빚어 불에 구운 작품)와 건칠(틀 안에 삼베를 붙이고 옻칠을 한 작품)은 그가 끊임없이 도전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작품은 잘 팔리지 않았고, 친분을 나누는 지인도 적었다. 그가 느꼈을 고독은 마지막 자취에서 찾을 수 있다. 그는 1973년 5월 3일 고려대박물관에 들러 자신의 출품작 세 점과 가만히 눈을 맞춘 뒤 다음 날 성북구 아틀리에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생전 쓸쓸히 한길을 걷던 그의 인생이 탄생 100주년인 올해, 늦었지만 재조명받고 있다.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에서 ‘권진규 탄생 100주년 기념―노실의 천사’전이 5월 22일까지 열리고 있다. 노실은 가마 또는 가마가 있는 아틀리에를 뜻한다.
김태언 bebor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