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금 사후에 생전의 공덕을 기리어 붙인 이름인 묘호(廟號)에는 조와 종이 있다. 조는 공을 세운 임금에게 증정하는데, 공은 왕조를 개창한다거나 국난을 극복한 공을 말한다. 선조라는 묘호는 임진왜란을 극복하는 큰 공을 세웠다는 의미에서 ‘조’자를 붙인 것이다.
그러나 선조에 대한 현대인의 평가는 박하다 못해 거의 최악 수준이다. 임진왜란이 나기 전에 선조의 치적에 대한 평가는 좋았다. 당대의 민심이 그랬다. 임진왜란 중에도 선조의 판단력은 훌륭한 편이었다. 이렇게 말하면 서울을 버리고 도망간 건 뭐냐고 분노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고려 현종, 명종, 공민왕, 조선의 인조 등 수도에서 피란한 왕이 한둘이 아니다. 몇 가지 실수를 인정한다고 해도 제대로 된 행적도 많았다. 이순신을 파격적으로 등용한 사람도 선조다.
하지만 이순신 해임부터 일이 꼬인다. 이순신 해임으로 칠천량에서 조선 수군이 거의 전멸하고, 호남이 쑥대밭이 되었다. 임진왜란 전사에서 최대의 비극이 다 이때 벌어진다. 그 와중에 이순신이 명량해전으로 최악의 상황을 막았다. 이제 선조는 어떻게 해야 했을까? 실수를 되돌릴 수 없다. 그렇다면 자신의 실수를 솔직히 인정하고 이순신에게 몇 배의 보답을 하는 것이 자신의 명예를 만회할 수 있는 길이었다.
선조는 반대로 한다. 명나라 장군들이 놀라서 이순신을 칭찬했다. 명군 총사령관 양호는 선조에게 와서 이순신에게 어떤 포상을 했느냐? 포상이 부족하면 자신이 직접 포상하고 싶다고까지 말했다. 이순신이 전사하자 명나라 병부상서 형개는 너무 애통해서 제사를 지내주었다고 말하고 선조에게 특별 제사를 지내라고 권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선조는 여전히 떨떠름했다. 이순신의 공을 인정하면 자신의 실수를 더 드러내는 것이라고 생각한 듯하다. 이것이 선조의 명성에 돌이킬 수 없는 타격을 주었다.
우리 정치인들은 잘못을 인정하는 데 정말 박하다. 선조처럼 한 번 잘못을 인정하면 더 밀린다고 생각한다. 정치와 줄다리기를 구분하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