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4년 스웨덴 왕립 예술아카데미가 130년 역사상 처음으로 여성 입학을 허락했다. 프랑스의 에콜 데 보자르보다 33년이 더 빨랐다. 그 덕에 재능 있는 스웨덴 여성들이 전문 교육을 받고 화가로 활동할 수 있었다. 시그리드 예르텐도 그중 한 명이었다.
스톡홀름에서 미술을 공부한 예르텐은 1909년 파리의 앙리 마티스 작업실에 등록했다. 색감이 뛰어나 마티스가 가장 총애하는 학생이었다. 1911년 같은 스웨덴 화가 이삭 그뤼네발트와 결혼한 후 귀국해 국내외 전시에 함께 참여하면서 경력을 쌓았다.
마티스 영향이 보이는 이 그림은 부부의 스톡홀름 작업실 내부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예르텐을 사이에 두고 소파에 앉은 남편과 동료 화가가 대화를 나누고 있다. 긴 치마와 블라우스 차림의 화가는 다소곳이 앉아 듣고만 있다. 이들 앞에 놓인 찻잔은 분명 그녀가 준비했을 테다. 이 모습을 검은 드레스의 여자와 또 다른 남성 화가가 전경에서 웃으면서 지켜보고 있다. 도도하면서도 거만한 포즈로 남자에게 기댄 이 여자도 화가 자신이다. 화면 오른쪽에는 부부의 어린 아들이 기어오고 있다. 그러니까 이 그림은 예술가이자 여성, 아내, 엄마로서 1인 4역을 도맡은 그녀의 혼돈스러운 현실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예르텐은 다작하는 화가였고, 생전에 106번의 전시회에 참여할 정도로 열정적으로 활동했다. 그런데도 비평가들은 여성이라는 이유로 그녀의 예술에 부정적이었고, 몇몇은 매우 모욕적인 평론을 썼다. 제도가 갖춰졌다고 관습과 편견까지 바뀌는 건 아니었다. 게다가 정신분열증으로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되자, 바람둥이 남편은 다른 여자를 만나 떠나버렸다.
행운의 신이 찾아온 건 51세 때였다. 1936년 스웨덴 왕립 예술아카데미에서 열린 개인전 때 500점의 작품을 다 본 후 평론가들은 말했다. 예르텐은 ‘스웨덴의 가장 위대하고 독창적인 현대예술가 중 한 명’이라고. 처음으로 받아보는 제대로 된 평가이자 찬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