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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이 사라진 세상에 부는 피바람

Posted September. 11, 2023 08:37,   

Updated September. 11, 2023 0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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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세상에 완벽한 진통제 ‘NSTRA-14’가 등장한다. 중독성도, 부작용도 없는 이 진통제 덕에 이젠 아픔을 호소하는 이는 없다. 고통이 사라지자 천국이 도래한 것만 같았다. 하지만 곧 이에 반대하는 신흥 종교 ‘교단’이 등장한다. 교단은 “고통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든다”고 주장하며 NSTRA-14를 만든 제약회사 직원들에게 테러를 가한다. 고통 없는 세상을 꿈꾸는 이들은 이에 대항해 교단 지도자들을 살해한다. 고통 없는 사회는 진정 천국일까. 고통을 두고 벌어진 이 싸움은 어디로 치달을까.

지난달 31일 출간된 정보라 작가(47)의 장편소설 ‘고통에 관하여’(다산책방·사진)는 고통이 사라진 세계를 그린다. 미래를 상상하는 공상과학(SF)에 등골을 서늘하게 하는 서사가 가득한 호러를 버무린 독특한 작품을 펴냈던 정 작가가 이번엔 살인 사건의 비밀을 추적하는 스릴러를 더했다. 정 작가는 8일 전화 인터뷰에서 “고통이 사라지자 고통을 다시 갈망하기 시작한 세상의 모습을 실감 나게 그리고 싶었다”고 했다.

“인간에게 신체와 감각이 있으니 쾌락을, 고통을 느낄 수 있는 겁니다. 고통과 쾌락의 근원이 같다는 점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정 작가가 고통에 대해 고민하게 된 건 2009년 미국 인디애나대에서 슬라브 문학을 전공하며 박사 논문을 쓰면서다. 안드레이 플라토노프(1899∼1951) 같은 러시아 작가들은 당시 러시아에 만연한 고통을 벗어나기 위해 유토피아 소설을 썼다. 러시아 민중이 식량이 없어 굶어 죽는 생활고와 피비린내 나는 러시아 혁명을 거치며 인간의 고통에 대해 질문하기 시작했고, 러시아 작가들은 이런 고통이 사라진 유토피아를 꿈꾸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2018년 미국의 한 SF 행사에서 마약성 진통제에 대한 문제를 들으며 다시 한번 고통에 대해 생각했어요. 1991년 걸프전, 2018년 아프가니스탄 전쟁에 참전한 미국 군인들이 부상 후유증을 치료하기 위해 마약성 진통제를 복용하다 마약 중독자가 됐죠. 최근 한국 사회에도 프로포폴 같은 마약성 진통제가 널리 퍼지고 있는 점에도 영향을 받았어요.”

그는 “신흥 종교 ‘교단’을 소설에서 그린 건 최근 논란이 된 종교단체 JMS처럼 고통스러운 사회일수록 사람들이 사이비 종교에 빠지기 때문”이라며 “고통이 사라지는 유토피아를 꿈꾸는 사람들이 여전히 이 시대에 많다는 걸 깨닫고 작품을 쓰기 시작했다”고 했다.

정 작가는 지난해 단편소설집 ‘저주 토끼(Cursed Bunny·래빗홀)’가 영국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최종 후보에 오르며 주목받았다. 부커상은 노벨 문학상, 프랑스 공쿠르상과 함께 세계 3대 문학상으로 꼽힌다. 그는 12일(현지 시간) 독일 베를린 국제문학축제에선 한국의 환상문학에 대해 강연한다.

“해외 독자들은 옛 고대 신화 전설이 현대 한국의 환상문학에 미치는 영향에 관심이 많더라고요. 저 역시 올해 5월 구미호 설화를 재해석해 장편소설 ‘호’(읻다)를 펴냈어요. 다음 장편소설에선 귀신 이야기로 돌아올 계획입니다.”




이호재기자 hoho@donga.com